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경님 Jun 08. 2023

23. 나의 첫 번째 보호자 김채원

청각장애 언니를 둔 동생

나에게는 두 명의 동생이 있다.

나의 모든 시간을 함께한 두 살 터울 여동생과 늘 허세로 똘똘 뭉친 사랑스러운 8살 터울 남동생이 있다. (사랑스러운이 32살 성인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아직도 나에겐 뽀글 머리에 콧구멍 벌름거리던 6살 모습이다.)


두 동생과의 에피소드들만 책 한 권이 나올 분량이지만, 오늘은 나의 심적 보호자였던 여동생에 대한 기록을 해보려 한다. 동생은 나에게 웃음으로 시작해 울음이 터져버리고 마는 애틋하고도 가슴 아린 존재이다. (‘아무튼 떡볶이’ 요조 님의 표현을 빌렸다.)

     


아직 여동생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친아빠의 빈자리를 엄마 혼자서 감당하기엔 많이 버거웠던 것 같다. 늘 불안했던 엄마와의 관계에서 우리 두 자매는 시골 친할머니댁에 맡겨졌다. 내가 7살, 동생이 5살일 때 강원도 원주시 둔내면의 친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시골에 맡겨진 우리 자매는 약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외로운 시간을 함께 버텨냈다.시골에서 지낸 시간들이 우리 두 자매를 더 특별한 감정으로 묶어놓았다.


아직 어렸던 5살의 어린 동생은 눈치가 없다고 혼나고, 눈치가 있었던 7살의 나는 가는 귀가 먹었다고 혼났다. 나는 어린 동생이 눈치가 없다며 혼나는 것이 싫었고 어린 동생을 혼내는 친조부모가 미웠지만 항상 술에 취해있던 친조부로부터 동생을 지킬 만큼 용기가 있지도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어린 동생을 늘 내 곁에 두었다. 동생이 어두컴컴한 밤에 홀로 벌을 받느라 잠도 못 들고 서 있으면 호랑이 같은 친조부 몰래 내 옆으로 불러 재웠다. 혹시나 할아버지가 깨서 동생을 확인할까 싶어서 나는 이불 끝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이불의 바스락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나는 손에 느껴지는 이불의 움직임으로 할아버지가 움직이는 것 같으면 어린 동생을 재빨리 깨워 다시 벌을 서도록 하는 밤이 수 차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동학대도 이런 아동학대가 없을 거다. 5살 난 아이를 벌세운다고 밤새 꼬박 새워놓다니...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던 5살 동생도 언니가 혼나는 게 너무나 싫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나를 부르면 바로 내 손을 잡아당겼다. 멀리서 놀다가도 어떻게든 나타나서 나에게 알려주었다. 


“언니~ 할머니가 불러!” 

아마 이때부터였나 보다. 동생이 곁에 없으면 너무 불안했고 같이 있으면 어디서 누가 말을 걸어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7살의 내가 시골 학교의 병설유치원으로 등원을 하면, 5살의 동생은 갈 곳도 놀 곳도 없어 늘 학교 운동장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럼 7살의 나는 유치원에서 나오는 간식을 운동장에 있는 동생에게 건네주었다. 유치원에 다니지 않는 동생이 운동장에서 쫓겨날까 봐, 간식을 건네주는 내가 혼이 날까 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떠오를 때마다 코가 찡하며 눈물이 차오른다.

언니 따라다니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던 나의 작은 동생은 꽤 어릴 때부터 천천히 언니의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5살의 동생에겐 내가 유일한 보호자였고 7살의 나에게도 5살 동생이 유일한 보호자였다.

     

어려서부터 같이 TV를 보아도 나는 내용 이해가 느렸다. 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으니 같이 시청을 해도 항상 물어보기 바빴다. “왜 저러는 건데??” 그러면 동생은 바로 전 상황을 다시 설명해 주었다.

 “아까 저 언니가 저 사람한테 나가라고 해가지고 지금 저러고 있는 거야”

“아아~”      

착한 내 동생은 내가 재차 물어도, 나에게 여러 번 설명해 주어야 할 때에도 귀찮음이나 짜증이 없는 어린 보호자였다.


내가 인공와우 수술을 하고 작은 소리에도 반응을 하자 여동생이 물어봤다.

“언니 얼마나 들려? 대사가 얼마나 이해가 돼?”    

 


아직 내가 장애인 등급을 받기 전, 작은엄마와 작은 아빠들을 만나는 가족 모임이 있었다. (나의 아빠에게는 두 명의 남동생이 계신다. 지역이라도 다르면 인천 작은 아빠, 안산 작은 아빠라고 호칭할 텐데 하필 같은 지역에 거주하셔서 우리끼리 큰 작은 아빠, 그냥 작은 아빠라고 구분하기로 했다.) 큰 작은엄마는 목소리가 높고 가늘다. 이 말은 고주파가 죽고 작은 소리를 못 듣는 고도 난청인인 내가 굉장히 대화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입모양을 보고도 알아듣기 힘들었던 나는 애매한 웃음과 대충의 대답으로 “네네~” 하며 얼며 부렸다. 그 모습을 본 동생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큰 작은엄마의 이야기를 대신 전달해 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큰 작은엄마가 한마디 하셨다.      


“아니 한국어인데 왜 해석을 해주는 거야~”      

우리말 대화인데도 다시 전달해 주는 동생이나 그런 동생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이나. 우린 서로에게 너무 당연한 존재였고 그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다.




첫째 딸이 갓 100일을 넘겨 4개월이던 추운 1월, 새벽 일찍 신랑 도시락을 싸서 출근시키고 안방에서 4개월 딸과 아주 달콤한 늦잠을 잤다. 상황이 잘못되었을 때 흐르는 무거운 공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여느 때와 별 다를 바 없는 고요한 오전이었다. 9시가 넘어 느지막이 일어나 4개월 된 딸을 안고 안방에서 거실로 나왔다.

쾅쾅!

현관문이 부서질세라 쳐대는 소리가 들렸다. 놀랄 새도 없이 들리는 음성은 우리 첫째 딸의 이름이었다. ‘아니 무슨 일이야!’ 문을 열었더니 너무 당황한 나와는 반대로 여동생은 열이 잔뜩 올라 있었다. 자느라 전화 진동도 못 느끼는 나 때문에 신랑이 근처에 사는 처제를 우리 집으로 보낸 것이었다.

당시 유독하셨던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1월의 얼음 바람이 가득한 복도에서 철제문을 1시간 이상 두드렸던 동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님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다급했던 동생이 얼마나 문을 차고 두드렸는지 옆 라인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 나왔다고 한다.(우리 집은 복도식 아파트) 언니가 못 듣는 것을 아니 조카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고 한다. 혹시라도 조카가 이모 목소리를 듣고 울음이라도 터트릴까 싶어서. 지금도 그 얘기를 하면 동생은 단전에서부터 묵직한 한숨을 끌어올린다. 이 자리를 빌려 동생에게 ‘내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사과를 하고 싶어졌다. 그 추운 겨울에 포기하지 않고 현관문을 부서져라 쳐줘서 고맙고 미안해.     

 

각자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룬 지금도 여동생은 나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준다. 전화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김경애”가 되어준다. 계단식 아파트의 같은 층에서 마주 보며 살고 싶다는 내 동생. 내 동생의 그 예쁜 소망이 꼭 이뤄지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22. 이제 저도 잘 들을 수 있을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