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르카에서 본 스페인 사람들의 와인사랑
와인 속물(wine snob)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와인을 허세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와인을 함께 마시며 그 와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이 단어와는 상관 없다. 오히려 적극 권장해야할 사안이다. 하지만 와인을 고를 때 가격과 명성만을 위주로 고르고 나머지 와인들을 맛보려하지 않는 와인 속물들과는 한 잔의 와인도 함께하기 힘들다.
내가 살고 있는 독일도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와인샵에 가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레스토랑에서는 일반적으로 와인의 소매가에 2배 정도를 받는 게 보통이다. 와인샵에 가도 독일 와인의 비율은 보통 30%를 넘지 않는다. 대게 프랑스, 이탈리아의 유명산지에서 공수해 온 와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독일에도 편안하게 와인을 즐기는 사람은 많지만 와인에 대한 진입장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달랐다. 유럽인들의 손꼽히는 여름 휴양지인 마요르카(Mallorca)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와인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 달랐다. 해변이 보이는 멋진 레스토랑에서 와인의 소매가+5~10유로 만을 더해서 판매한다고 생각해보라. 잔을 닦고 서빙하는 가격도 안나올 게 분명하다. 화이트 와인을 시키면 얼음을 잔뜩 넣어서 칠링해서 가져다주고 레드와인을 시켜도 셀러에 보관하여 적절한 온도를 유지한 채로 가져다 준다. 예컨대 유럽 평균가 29유로인 Dominio de Pingus PSI 라는 와인은 39유로였다.
아름다운 해변의 자리값과 각종 와인 서비스 제반비용을 겨우 10유로로 퉁친다는 일은 한국은 커녕 독일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저 와인은 독일에서 60~80유로 선의 가격을 형성했을 것이다. 이 레스토랑만의 일인 줄 알았으나 모든 레스토랑이 그랬다. 가격 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묵었던 호텔이었다. "all-inclusive"라는 옵션을 추가해서 모든 호텔 서비스가 공짜거나 조금 할인된 형태로 제공되는데 무료 하우스 와인 외에 추가로 선택할 수 있는 와인리스트는 가히 압권이었다. 스페인의 전설적인 와인인 베가 시실리아의 "Unico" 2006년 빈티지가 겨우. 정말 겨우 189유로였다. 당장 해외 평균가를 검색해보면 300~400유로선이다. 그런데 189유로라니!!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바로 주문했다. 그러자 이어지는 디캔팅 서비스에 또 한 번 감동을 가져왔다.
가격적인 면을 떠나서 스페인 사람들의 와인사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또 있다. 슈퍼나 백화점등의 와인 매장을 가보면 90%이상이 스페인와인이다. 거기에 한 30%는 로컬와인이 있다. 심지어 마요르카라는 와인 변방에서도 로컬 와인이 있다. 전 국토가 와인산지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자타공인 세계 최고라는 프랑스 와인은 그저 구석에 두어병 쳐박혀 있을 뿐이었다. 자타공인이란 말에서 "타"에 스페인은 포함되지 않은 듯 했다.
족히 천병은 넘어보이는 매장에 겨우 요정도 칸을 차지하고 있고 칠레,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등지의 와인과 함께 프랑스 와인 두어병이 진열되어있다.
이 얼마나 국수주의적인가? 그러나 거북스럽지 않았다. 그들의 자부심이 보였고 와인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고 그저 저렴하고 맛있는 지역 와인을 찾아 마시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우리가 늘 찾는 그런 고급스러운 와인들은 백화점 어느 구석에 "gourmet market"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존재했다. 부르고뉴, 보르도, 토스카나 등의 고급 와인들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정말 쇼핑온 외국인들 몇 명이 전부였다.
이렇게 자국의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밤에 거리로 몰려나와 허름한 선술집에서 간단한 안주들과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인데 참 우리나라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타파스는 한국 말로 그냥 주전부리고 타파스바라는 고급진 표현은 그저 선술집이었다. 막걸리 대신 와인을 마실 뿐이다. 그랬다. 와인이란 편안한 분위기에서 좋은 사람들과 흥겹게 마시면 그 뿐이었다.
그들에게 와인이란 허세가 아니라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