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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임 Jul 14. 2024

방송은 어디로 가나?

일관성 상실의 시대를 보는 눈



 어릴 적 아침이면 대문 앞의 신문을 주워 할아버지께 가져다 드리고, 저녁이면 식구들이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TV에서 나오는 뉴스에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혀를 차거나 감탄을 하고는 했다. 그런 일상이 새로운 소식에 대한 모두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어느 휴일인가 점심 전에 거실에 있던 나는 '무엇들을 하나?'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방 하나씩 끼고 누워있는 아내와 딸을 보았다. 잠을 자는 건 아니고, 나름의 미디어 기기에 삼매경들이었다. 딸애는 탭북의 무언가를 열심히 스크롤하고 있었고, 아내는 스마트 폰으로 블루투스 연결을 하여 너튜브 시청을 하는 중 인 것 같았다. 거실의 TV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스마트한 기기로 얼마든지 각자의 관심 분야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거실의 TV는 더 이상 구심점 역할을 잃어버렸다.



 우리 집 상황 또한 그러하니 기존의 방송들은 점점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어느 공중파 방송국의 신작 드라마는 0.5%의 시청률을 기록한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드디어 0%의 형편없는 시청률로 속절없이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서로 주고받는 것 없는 소통의 부재는 대중들의 관심사가 아닌 것이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방송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1인 미디어의 등장으로 대중은 소비자 이면서 생산자의 위치에 올라 미디어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액션캠이나 스마트 폰을 거치해 놓고, 무언가 열변을 토하거나 이런저런 해설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나의 직장이 공원과 가깝고 도심의 중심가이다 보니 자주 보는 광경이다.



 모든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제외하는 유통의 흐름은 상상할 수없다. 콘텐츠의 비즈니스도 범용 플랫폼 제공사와 이를 이용해 콘텐츠를 양산하는 개인 채널 운영자에게로 이동한 지 오래다. 정보의 수집과 정치 소식 등도 개인 방송으로 소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각 분야별의 스타급 강사의 영향력은 여론을 선도하여 정부정책을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이와 같이 소셜미디어 채널의 구독을 통한 정보의 즉시성은 막강한 힘이 되었다. 이에 따른 반작용 또한 만만치 않아 졌다. 즉, 1인방송과 OTT서비스 등은 자정적인 정화기능의 부족으로 인한 대중 정서의 위협과 그동안의 편중된 광고 생태계를 혁파하는 쪽으로 진화하고 있다.



 소셜미디어는 이미 언론권력이 되었지만, 규제하는 법은 뒤늦게 허둥대고 있다. 그에 비해 기존의 방송 산업은 여전히 규제라는 역차별로 묶여있다. '방통위'라 부르는 심의기구는 이러한 규제의 대표적인 기관이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었다. 전파 중심의 일방적인 지상파 플랫폼은 한계상황에 이르렀다. 언론이 제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심심찮게 나도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선보일지 아직은 미지수지만, 소셜미디어 플랫폼과 지상파 방송의 협업을 통한 새로운 기획은 절실한 과제로 보인다. 하지만 방송계의 대처는 아직 미온적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앞으로 몇 년 후엔 지금과 같은 TV방송 시스템은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지금의 혼동된 시간이 흐른 후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된 방송의 진면목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이 일방적인 전파 네트워크는 존재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편성의 경직성과, 실시간 양방향 서비스의 부재는 몰락을 가속화할 것이 분명하다. 2014년 이른바 '드루킹 사건'은 정치판에서도 방송보다는 여론이 움직이는 판세 분석을 위해 댓글 조작을 통한 여론의 추이를 유리하게 이끌려는 시도였다. 이는 이미 방송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반증이 되고 말았다. 지금의 방송은 표류하는 상태다. 몇 명의 유튜버를 예능 프로그램에 투입시키는 것만 봐도, 스스로의 구조 시스템에 확신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방송은 실질적인 생존의 기로에 서있다. 모든 광고는 이미 분산되어 방송을 외면한 지 오래되었다. 이는 수입에 직결되는 문제로 종사자들의 생존과 관계되는 일이다. 지구촌 지역단위의 방송은 거대한 공룡인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하위 생태계로 전락하였다. 비록 지역단위이지만 방송은 미디어 시장에서 한창 변혁의 격동기에 공룡놀음에 빠져 있었다. 투자나 서비스 실험도 미비하고 인터넷 기반 서비스와 비교하여 비용면에서도 완패하였다.



 방송사의 광고매출은 급격히 줄어간다. 콘텐츠 판매 수익도 감소했다고 한다. 유튜브 또는 넷플릭스 등의 OTT 동영상 플랫폼으로의 집중화 현상 등 외부환경에 따른 위축은 어쩌면 당연하게 보인다. 거기에 공영방송의 경우는 수십 년에 머무르고 있는 2,500원의 비현실적인 수신료 등도 방송재정의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수신료만이 문제가 아니라 가장 큰 문제는 모바일 중심의 미디어 이용환경이 증가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애플리케이션 중심의 소셜미디어는 광고와, 콘텐츠 서비스 시장도 압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상파 방송은 이대로 몰락하고 말 것인가? 



 무엇보다도 방송계의 내부적인 문제점의 해결과 그동안의 전승된 방송 플랫폼의 임계점 돌파가 시급하다고 한다. 방송사는 숙련된 인력과 콘텐츠 경쟁력이 있다. 무엇보다 창의적인 제작 능력자를 보유하고 있다. 반면 여전히 글로벌 진출전략이 허약하고, 다른 플랫폼과의 연계한 서비스 정신도 일천해 보인다. 그래서 방송의 미래 생존전략은 소셜 플랫폼에서 찾아야 한다. 즉, 콘텐츠 우위의 자신감 이외에 서비스로 도약을 해야 살아갈 출구가 보일 것이다. 그동안의 제작과 서비스 문화를 바꾸기는 당장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생명의 연속성이 짧고, 유행에 민감한 소셜미디어 시장에서 고객 서비스 마인드부터 바로 세우는 기풍이 필요해 보인다.



 기존의 방송들은 소셜미디어들과 협업 전략이 필요해질 것이다. 화두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다른 플랫폼을 받아들여 연결하고 융합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며 융합 서비스를 보여준 스티브 잡스의 철학도 다시금 재조명되어야 한다. 기왕의 것에 새로운 것들의 조합이야말로 창조적 아이디어 아닌가? 그러므로 이용자인 고객들에게 개념의 모델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방송의 미래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지만 거대한 변화의 물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의 AI전쟁은 이미 혈투 중이다. 전 세계를 두고 패권전쟁이 한창이다.



 우리의 기존 미디어인 방송의 미래는 어찌 될 것인가? 무엇을 실천하여 이런 현실을 타개해야 하는가? 우선은 현실을 스스로 깨닫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방송 플랫폼이란 기존의 단지가 비어있는 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직은 나라별로 개별화 전략이 부재해 보인다. 소셜미디어 시장이 이미 약육강식의 세계라지만 방송 콘텐츠는 나름의 강점으로 판을 흔들어 봐야 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또는 토종 플랫폼인 카카오톡과 밴드 등과도 손을 잡고 콘텐츠 소비의 개념을 바꾸는데 노력해야 한다. 빠른 변화의 속도에 익숙한 새로운 디지털 인류를 만족시키는 서비스가 필요하다.



 모든 분야에서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더 이상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모든 것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방송이라고 '별유천지 비인간'의 그들만의 리그로 남아있다가는 소리소문 없이 사그라질 수 있다. 최근의 '문학사상사' 폐간과 더불어 '이상문학상'과 신인문학상도 중단된다는 소식이 자못 놀랍다. 이유는 문학월간지의 수요감소와 출판지형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라고 한다. 더 이상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문학예술은 설 곳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작가님들은 나름의 충격파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온라인 공간이 아니면 글쓰기는 의미를 상실하는 쪽으로 진행되어 왔다.



 방송은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지하는 노력이 어느 분야보다 맹렬할 것이다. 소셜의 특성을 살린 콘텐츠를 제작해 융복합 플랫폼에 통로를 개척하고,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영상미디어를 고려해야 한다. 아마도 그러기 위해서 한동안의 혼돈과 공백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소비자가 열광하는 창조적인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해야 방송의 미래가 다시 열릴 것이다. 지금은 과도기이며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우리는 망연자실 보고 있는 중이다. 거대한 너울성 파고는 이미 우리의 생활에 스며들고 있다. 우리 모두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종속된 방송의 미래는 보고 싶지 않다. 우리의 목소리와 화면을 발전 융합시켜 주권을 지켜내야 한다. 그것이 방송의 사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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