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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몬 Oct 29. 2022

직접 체험한 2008 베이징 올림픽 전후의 중국

변화의 물결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바로 1년 전인 2007년, 어학연수를 위해 갔던 베이징.


후진국, 짝퉁의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던 중국을 직접 마주하기에 두려움이 컸지만 나는 무언가에 이끌려 베이징으로 향했다. 결론적으로 베이징에서의 1년은 내 인생에 있어 큰 영향을 준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그로 인해 유학생활이 끝나고도 중국에서의 기억들이 많이 났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의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내 인생 가장 즐거웠고 행복했던 시절이며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위해 힘껏 달렸던 1년. 그리고 끝끝내 그 목표를 이루고 말았던 성취감까지. 중국 유학은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한 1년이었다.


그런 나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곳 베이징은 격변의 시기이기도 했다.

베이징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매일매일 도로가 새로 깔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인도 바닥이 새로 바뀌어있었으며 오래된 건물은 허물고 신식 건물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처음 베이징에 갔을 때만 해도 3개밖에 없던 지하철 노선이 10개 넘게 깔리는 등 변화의 속도는 어마 무시했다.


베이징 올림픽 주 겅기장


누가 '천천히 하자'라는 뜻의 만만디의 나라 중국이라고 했던가?

공산주의에서 사회주의 경제 체재가 더해지면서 돈 맛을 본 중국인들은 밤낮으로 돈을 벌기 위해 뛰었다. 공산주의 사상, 그것은 인간의 욕심을 억제하는 사상이었고 예로부터 상술에 뛰어난 중국인들의 기질을 가두어 두었지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그들 본연의 기질이 살아나면서 중국 경제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정점에 달한 것이 베이징 올림픽이다.


베이징 올림픽 전의 중국 환율은 1위안 당 약 120원이었다.

나는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8월) 약 5달 전쯤 환율 오르니 빨리 환전하라는 형들의 말을 듣고 급히 환전을 하기도 했다. 환율은 올림픽이 열리던 2008년 초부터 조금씩 오르더니 약 10월쯤 역대급 최고조인 250위안 정도까지 올라가버렸다. 2008년 한 해를 모두 중국에서 보낸 나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올해 2022년, 중국 환율이 많이 올라 1위안 당, 200원 가까이 되었지만 2008년의 환율을 따라가지는 못 할 정도니 그땐 정말 심각했다. 360원을 주고 먹던 밥이 몇 달 뒤 750원이 되는 마법을 보았다.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한국인)는 베이징에서 본과생으로 재학 중이었고 어차피 베이징에서 오래 살 거면 집을 살 생각도 했는데 베이징의 대학로라고 할 수 있는 우따오코우(五道口)에서 바로 옆이 지하철 13호선, 바로 앞은 코리아 타운이 있는 곳의 아파트를 1억에 사려고 했었지만 매도인의 불성실한 태도로 계약서 사인 직전에 그만두었는데 지금 그 집은 약 20배가 올라 20억이 넘는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부동산 붐이 불었고 너도 나도 집을 사기 시작하면서 중국 전역의 집값은 폭등했다.


엄청난 교통의 발전도 이루어냈다.

3개밖에 없었던 베이징 지하철 노선은 이제 서울만큼 많아졌고 2007년 처음 갔을 때만 해도 자전거가 즐비했던 베이징은 자전거를 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으며 대부분이 전동자전거나 승용차로 바뀌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 호 정도 밖에 안되던 기차들은 KTX 같은 고속열차들이 생겨나 전국을 이었고 항공사들이 늘어났으며 우리나라 70년대에 있을 법한 택시들은 모두 현대식 차량으로 교체되었다.

현재의 베이징 지하철 노선도


인민들이 살만해지자 중국의 패션과 뷰티도 엄청나게 발전했다.

내가 유학할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은 조금 촌스러운 편이었다. 한국인들의 패션과 잘 꾸미고 다니는 외모를 우러러볼 정도였다. 한국인이 지나가면 너무 예쁘다, 잘생겼다는 등 옷도 너무 잘 입고 화장도 잘한다고 생각하였는데 경제가 발전하니 패션과 뷰티 산업이 엄청나게 발전하여 한국과 세계의 많은 패션, 뷰티 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하기도 했다. 넓디넓은 대륙과 13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이라는 매력적인 시장에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급속한 발전은 사회적인 문제도 야기 시킨다.

빈부격차는 물론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음식을 가지고 장난치는 행위는 정말 보기 힘들 정도였다. 당시 나는 매일 아침 중국식 만두인 '빠오즈'를 먹었는데 이 빠오즈 안에 고기 대신 골판지를 다져 넣어 '골판지 만두'라는 뉴스가 나오며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돈이 되면 무슨 짓이든 하는 그런 마인드는 같은 중국인이라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나는 중국 유학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바뀌게 되었다.

사람들은 각자 가진 환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인으로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그것도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게 되었으며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에 따르라는 말이 왜 있는지 정확하게 알게 된 계기였다.


베이징 유학을 통해 나는 중국通이라는 꿈을 꾸게 되었고 졸업할 때까지 남들 토익 공부할 때 중국 하나만 팠다. 중국에 대한 책을 읽고, 중국어를 공부하며, 중국 여행을 하며 중국이라는 나라를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나에게 찾아온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았고 10년간의 중국 대기업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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