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의 온도가 식다
현대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평등하다.
출생에 따른 법적 신분은 없고,
모두에게 교육과 기회가 열려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진짜 출발선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여건을 손에 쥐고 태어난다.
부모의 자산, 배경, 학벌, 인맥, 거주지.
그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인생 경로를
노골적으로 설계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삶의 격차로 드러난다.
기회는 이미 나눠져 있다.
노력은 누구에게나 허용되지만,
기회의 입구는 애초에 닫혀 있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러니 “기회는 평등하다”는 말은
문이 없는 방 앞에서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말한다.
“요즘은 금수저든 흙수저든, 노력하면 된다”라고.
그러나 그 말속엔
태어남의 차이를 감추려는 기만이 숨어 있다.
이 구조는 병목현상처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한 좁은 통로에 몰아넣고 의미도 없는 경쟁을 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가 은밀히 만들어낸 새로운 신분 제도다.
과거에는 토지와 혈통이 계급을 나눴다면,
지금은 자산과 교육, 그리고 부모의 배경이
사람을 보이지 않는 층위로 나눈다.
사회는 그 위에 이름표를 붙였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무심한 유머처럼 들릴지 몰라도,
이 단어들은
우리 사회의 잔혹한 계급표이자, 신봉건 사회의 은유다.
법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하다지만,
실제로는 다시
출생이 운명을 결정짓는 구조 속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계급은 이제 외치지 않는다.
대신 침묵 속에서 세습되고,
‘기회’라는 단어 속에 포장된 채 재분배된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과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진짜로 ‘새로운 시대’인가?
아니면,
이름만 바뀐 ‘신(新) 봉건사회’ 일뿐인가.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을까.
그 이유는 단지 돈과 시간이 없어서 만 은 아닐 것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이 사회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출산은 본능이 아니라,
삶을 믿고 다음 세대를 맡길 수 있을 때 가능한 선택이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는,
삶을 감당하기도 벅찬 개인에게
‘아이까지 감당하라’고 말한다.
공정하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은 삶 위에
누가 용감히 새로운 생명을 낳을 수 있을까.
한국은 출산율 세계 최하위,
자살률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슬픈 통계를 동시에 안고 있다.
그건 단지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신뢰의 붕괴와 동시의 불편한 심리의 붕괴이기도 하다.
미래에 대한 집단적 체념,
그리고 시스템의 냉정함이 낳은 결과다.
사람들은 말한다.
행복은 개인의 문제라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개인의 우울은 구조에 영향을 받으며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개인의 절망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징후다.
국민이 체감하는 삶의 만족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인간으로서 느끼는 존엄의 온도.
이 모든 것이 낮아진 지금,
출산율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건 선택이 아니라 저항이며, 비명이며, 구조에 대한 침묵의 고발이다.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청년은 떠나가고,
노인은 고립된다.
이 흐름은 단순한 인구 문제가 아니다.
한 사회의 생존 본능이 꺼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저출산은 국가의 문제가 아니다.
신봉건 사회가 만들어낸 필연적 귀결이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 우선시 되는 사회,
공정한 출발선이 사라진 사회,
희망의 축적이 불가능한 구조,
삶을 축복받지 못한 채 버티는 하루들.
우리는 이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어떤 정책도 출산율을 되살릴 수 없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이 사회는, 아이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 《사회계약론 中에서》
[법적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구조적 제약에 갇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