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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벤더 Feb 15. 2021

'의욕'

결혼 4년 차의 고충

  ‘의욕’. 책을 펼치고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단어이다. 사전적 의미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意志)” 다시 말해 어떠한 일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한다. ‘마음먹기 달렸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있다. 이러한 말들 속에는 의지가 담겨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의욕이라는 단어를 보고 나를 돌아보았을 때 요즘 나는 어떠한 부분에서 의욕이 없는 상태인 것 같다.


  2017년 12월 2일, 가을바람이 아직 채 가지시 않을 비교적 따뜻한 겨울날이다. 어젯밤 떨리는 마음으로 잠을 설쳤을 터라 몸은 피곤했지만 새벽 5시 30분. 눈을 뜨자마자 긴장되고 떨린 마음으로 웨딩 샾으로 출발했다. 피부가 예민했던 나는 신부화장으로 덮을 내 얼굴이 걱정되었는지 예비 남편의 조수석에 앉아 마스크 팩을 하며 말을 건넸다. “오빠 떨리진 않아?”라고 물으니 “떨리지~ 그래도 떨지 마, 잘할 거야”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긴장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그렇게 정신없었던 결혼식이 무사히 끝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우리는 함께라는 단어를 실감하며 어색한 모습 속에서도 아내와 남편이라는 역할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남편이 출근하는 모습,  익숙지 않은 동네 풍경, 퇴근 후 따뜻한 밥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아내 모습, 많은 익숙지 환경과 모습 속에서 서로 함께 하는 모습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결혼 뒤 얼마 되지 않아 시부모님들의 결혼기념일이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던 부모님들의 기념일에 새로운 가족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고민하고 생각하다가 서툴렀던 요리 실력으로 무언가 해보겠다며 레시피를 보며 축하상을 차리고 ‘경축 아버지, 어머니 결혼 31주년’이라는 현수막을 거실에 달아 가족들과 함께 축하자리를 마련해 드렸다.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상 요리실력 이라곤 서툴 때라 별로 맛이 없었는데도 고맙다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나 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결혼 전 남편의 동생 이름을 부르며 친근했지만 결혼 후 호칭을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 너무 어색하고 입에 붙진 않았지만 우리나라 유교적 문화가 그렇다고 하니 자꾸만 그렇게 부르려고 노력했다. 결혼 후 감사한 것이 너무 많았고, 가족이 생기고 늘 챙겨주시는 부모님들께 감사한마음도 커졌다. 한 달이 지나 우리의 새로운 출발을 밝혀주는 듯 한 해가 마무리되는 12월 31일, 시부모님들 집에서 하루 묵고 1월 1일 아침 가족들 모여 떡국을 함께 먹는 행사(?)가 있어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를 도와 아침 상을 차렸다. 뚜렷이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즐거운 시간들을 가졌다. 그 뒤 얼마 안돼 신정이 다가오고 설날이 되어 시댁 친척들의 가풍이라고 하는 온 가족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큰어머니 댁에서 2박 3일을 함께 머무르며 제사 없는 모임에 가족 예배를 다 함께 하며 나 또한 집안의 첫 며느리로서 이쁨도 많이 받았다. 형님네 방에서 형님의 침대를 양보해 주시고 형님은 바로 옆 바닥에서 주무시는 모습이 어찌나 불편했던지 다음날은 내가 바닥에 기어코 자겠다고 누워버렸다. 그렇게 길었던 2박 3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루 3 세끼를 고봉밥을 먹어 소화가 잘 되지 않았고 긴장된 마음이 가시지 않았지만 새로운 시댁 친척들과도 가까워진 것 같고, 결혼 후 새로운 가족들과 신앙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듣는 자리가 큰 의미 있는 자리도 다가왔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신혼의 나날들의 감사함이 깊어지고 있을 그때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무거운 마음으로 변화되고 남편에게만 잘하는 것이 결혼생활이 아닌 양가 부모님들과 자주 전화하고 뵙는 일을 앞으로 계속해야 한다 생각하니 내 안에 부담감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남편과 사소한 다툼이 날 때면 항상 빠짐없이 “시댁”이 그 주제였다. 우리 남편은 살면서 본 사람들 중 배려가 가장 많은 사람이었고, 가정적이며 누구보다 위로를 잘해서인지 감사하고 기쁠 때가 너무도 많았지만 부모님을 향한 마음도 그만큼 커서 나와 함께 그 마음을 공감하거나 같은 마음으로 부모공경을 하거나하긴 어려웠다.


   2021년 2월, 만으로 3년 2개월이 접어든 현재. 시간이 지나 자꾸만 감당해야 하는 부담감의 반복으로 둘 다 너무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작년 서울에서의 일 년을 보내고 다시 대구로 돌아온 작년부터 일 년이 지나갔다.

  처음 이야기했던 의욕이라는 단어가 내 모습에는 없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사라졌고, 이제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라는 결론으로 매번 남편과 부딪혔다.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애쓰고 어려워하는 남편에게 제대로 된 위로 한번 해주지 못했다. 내가 나 자신을 감당하기도 버겁다고 생각했다. 시댁 부모님들 뿐만 아니라 친정아버지와 더욱 가까이 지내야 하는 것도 버거웠다. 재작년 사고로 고관절 수술을 한 뒤 더욱 약해진 그분은 이제 노후를 책임져야 할 능력이 없었다. 그저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당장 눈앞의 걱정을 감추려 했던 술 한잔과 담배와 함께 하며 노후준비란 없었고 그 모든 것을 나 혼자만이 아닌 남편과 짊어져야 한다는 압박감은 항상 날 바닥으로 더 깊이 끌고 내려갔다. 남편의 말이 맞다. 나는 나의 부정적인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힘들다. 하기 싫다. 못하겠다는 생각에만 머물렀다. 그 생각을 떨치려 마음을 달리 먹으려 기도해봤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상황처럼 내 마음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남편은 어떻게든 해보자 노력해보자,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우리 둘 다 경제생활 부족함 없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리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괜찮다 할 수 있다는 말을 백번도 더 들었던 것 같다.


  올해도 여김 없이 12월 31일, 늘 그렇듯 시댁에서 잠을 자고 1월 1일 첫해 첫날 아침 시댁 부모님과 함께 하고 앞으로 며칠 뒤 다가올 설날도 하루 묵어야 한다는 그 숨 막힘이 또 반복되었다. 달리 생각해 보려고 해도 가슴에서 턱턱 막히는 무언가 걸려 내려가지 않는다. 이제 서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노력하며 살아갈 것인지 노력도 못할 만큼 힘들면 남편이 부모님들에게 앞으로 저희들 시간을 좀 가지겠다 라며 당분간 시댁을 가지 않을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자고 했다.


  지금 현재 나에게 필요한 건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인데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찾을 수 있을지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나보다 그간 노력해오던 남편은 바위에 계란 던지기 같은 마음으로 아마 수천 개의 달걀이 깨지는 힘듦을 경험하고 더 이상 못 던지겠다고 힘들다고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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