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뭔가를 시작하려 할 때 두려움은 실처럼 이어진다. 아이들이 잘할 수 있을까? 지워지지 않는 물음표. 장애정도는 어느 만큼일까. 염려가 안개처럼 스멀거린다. 늦은 감이 있지만 수업 삼일 전에 담당교사를 만난다. 아무것도 모르고 수업에 들어가는 것보다 아이들에 대하여 알아야 될 것만 같다.
도서관 ‘찾아가는 문화교실’ 강사로 지원을 했고 선정이 되어 장애인 복지관에서 맨 먼저 수업을 하는 날.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아이들도 첫 시간은 긴장을 한다고. 나랑 똑같다. 어쩌면 말은 안 하지만 나보다 훨씬 그 강도가 세지 않을까. 그래서 어른들이 같이한 아이들도 있다. 한 아이만 서서 시간을 보낸다. 밖으로 나가려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몸을 뒤로 뺀다. 같이 하고 싶다는 무언의 말처럼. 노래하는 것처럼 음이 있는 소리를 낸다. 내가 ‘노래하는구나’ 하자 담당 교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오래전에 어느 기관에서 방과후반 교사를 했었다. 장애아동들도 몇 왔었다. 이 수업이 어렵지 않게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그때 왔던 자폐아동이 있었다. 나이는 많은데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자신의 힘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것을 알고 위협하던. 부모님은 공무원이었고 일찍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겼다고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나이였을 때가 되어서야 집에 와 학교를 다녔다고. 그 아이를 더 일찍 살폈더라면. 퇴근하고 엄마나 아빠 중에 아이를 데리러 왔는데 늘 맨 나중이었다. 아이가 힘들게 하면 뾰족한 것으로 위협을 하여 겁을 주라고 부모님이 해결책을 알려주었다. 얼마 뒤에는 그것도 통하지 않아 힘들었었다.
시민정원사로서 봉사를 할 때에 한 분이 아들이 자폐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까지 마쳤고 엄마 말이라면 잘 듣는다고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고 다 잡았다고. 그분에게는 아이가 온통 엄마의 세상이었을 수도 있다. 할머니에게 맡겨 버린 방과후반에서 나에게 겁을 주던 친구는 결국 가족들과 살 수 없어 기관으로 갔다는 말을 먼 소문으로만 들었다.
두 권의 그림책을 준비했다. <<엄마, 선물이에요>>, <<돌꽃씨>>. 내가 먼저 소리 내어 여러 번 읽어본다. 카네이션 주머니 만들기니 <<엄마, 선물이에요>>와는 주제가 연결된다. <<돌꽃씨>>란 것이 궁금하여 검색을 해본다. 작가가 돌도 꽃이 될 수 있다는 뜻에서 제목을 달았나 싶었다. 해석이야 읽는 사람의 몫이니 어떻게 이해해도 틀리지 않는다. 돌이 씨를 품고 있다는 설정이 새로웠다. 두 권의 그림책 모두 기승전결이 분명하다. 그림책은 모든 연령대의 책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둘째 시간에는 초등학교 중학년 이상이었다. 독후활동이 주가 되어 다른 강사님이 진행한다. 공부와 연결되어서인지 아이들이 더 왔다. 학교가 끝나면 치료실 수업 들으러 다니느라 시간을 빼기가 어렵다는 담당선생님의 말에 가슴이 먹먹하다. 자신의 한계치를 높이기 위하여 누구나 애를 쓰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자폐아동이 더 많았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아! 저 아이들도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싶어 감동스러웠다.
그날 저녁 남편과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하려는 생각이 앞섰다. 낮에 보았던 아이들이 눈에 선하여 마음이 촉촉하게 차분했다. 실바람에 잔물결이 이는 것처럼 장애 아동들과 함께 한 순간은 마음 한 뼘 자라는 시간이었다. <<돌꽃씨>>에서 내 꿈, 네 소망 담은 나는 돌꽃씨라는 말처럼 아이들이 내 안에 들어와 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