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경주 속 간절함을 찾는 여행은 끝이 없다.
화려했던 1000년의 시간은 끝났지만
그 1000년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맛보자면
먼저 박물관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문화유산을 잘 알든, 알지 못하든
사람들은 박물관에 간다.
그것은 1000년 전 사람들과의 채취를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간절함을 맛보기 위해
경주에 있는 박물관들을 도장 깨기 하듯 돌아다녔다.
역시나,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천마총 내부였다.
그중에서 천마도와 금관을 복원하는 장인의 손이었다.
손은 뭉툭 손톱에는 때가 가득했다.
영상으로 남아있는 복원 과정 속 금관보다,
그의 손이 더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장인만이 가질 수 있는 명예의 훈장이
곳곳에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만든 '가짜'금관이 아닌,
현재의 장인의 손은 신라의 장인의 손과 더 닮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그것이 더 감동이었다.
뭉툭하고 둔탁해 보이는 그 손으로
신라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오롯이 느껴졌다.
나에게는 단순한 재현의 순간이 아닌,
교감의 순간으로 느껴졌다.
진정한 장인만이 느낄 수 있는 환희가
영상에서 묻어 나왔다.
그에게 간절함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금관을 복원하는 것 그 이상이리라.
경주국립 박물관에 와서는
남들이 잘 가지 않는 불교미술관을 찾았다.
관광객은 우리뿐인 줄 알았는데
2층에 홀로 불상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외국인이 보였다.
그녀는 어떤 사연으로 여기까지 온 것일까?
불상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낯선 타지의 박물관, 그것도 1000여 년 전 문화유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간절함은 마음속 장작이 타는 순간이다.
먼저 장작을 채워야, 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간절함은 마음속에 있는 열망이란 불꽃과 앎이라는 거는 장작이 있어야 가능한
상황이란 생각이 든다.
열심히 다른 나라의 것을 배우며 익히는 모습을
그녀에게서 발견한다.
아마도 먼 타국에서 자신의 마음을 태울 장작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국토.
신라 스스로 불렀던 이름이다.
부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이 뜻은 신라의 불교에 대한 자신감을 담고 있다.
박물관 내에는 이를 반영한 테마가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 탑의 형상을 한 방이 있었는데,
영상이 틀어져 있었다.
내 눈에는 그 영상을 바라보는 커플의 뒷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둘은 손을 맞잡고 속삭이고 있었다.
영상이 아닌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는 듯했다.
간절함은 홀로 일 때 보다, 함께 할 때 더 빛나는 것 아닐까?
그 둘의 모습이 진정한 탑 속 사리처럼 보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신라인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신라 영역 곳곳에 탑을 만들었다. 하늘의 별 보다 많이 탑을 만들어 중국인들에게 놀라움을 줬다고 한다.
그것은 신라인들의 간절함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한 명의 간절함이 아닌, 모든 신라인들이 간절했고 그 염원을 담아 탑을 만들었다.
그 총체가 불국토 신라는 아니었을까?
그것을 증명하듯,
그들의 뒤에 백여 개에 달하는 탑들이 놓여 있었다.
마음속에 부처님의 탑을 담고 싶었던 신라인들의 마음이다.
절이라는 공간을 떠나 어디서든 탑을 보며 자신의 삶을 더 의미 있게 되길
바랐을 신라인들의 생각, 삶이 나에게도 느껴지는듯하다.
그렇다. 간절함은 이래야 한다.
항상 기억할 수 있도록 들고 다녀야 한다.
그 결과가 1000년 신라의 역사가 된 것이다.
시원한 에어컨의 감사함도 잊은 채
박물관 내부를 돌아다니던 나는, 얼마 후 에어컨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하며,
박물관 밖 다보탑과 석가탑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
쉽다.
간절함이 없는 형태만 남은 빈 껍데기.
장인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돌로 쌓은 탑.
그것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양하는 성소라기보단,
피규어에 가까워 보였다.
이전 불국사에서 봤던 다보탑과 석가탑의 돌은 매끄럽지 않았다.
울퉁불퉁했다. 그 단단한 돌을 다듬기 위해 장인들의 손은 얼마나 닿았을까?
그리고 그 돌을 다듬으며, 장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간절한 마음에 한번, 진심으로 한 번, 열정을 담아 한 번,
수백, 수천 번의 정이 돌을 다듬어 석가탑과 다보탑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탑은 기계로 만든 피규어였다.
박물관의 경내를 꾸며주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광경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었다.
2년 만에 복원된 동탑은 영혼이 없다.
그러나 20여 년의 시간과 공이 들어간 미륵사지 서탑은
백제인의 영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누군가는 그 서탑을 이상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백제의 이상과 현실의 절망이 담긴 역사의 편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동탑은 무미건조했다.
딱, 거대한 돌로 만든 피규어에 불과했다.
그래서
복원은 간절함을 담아야 한다.
과거인의 염원과 현대인의 희망, 미래인의 기대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여주기식 복원과 모형은 피규어에 불과하다.
그 뜨거운 더위를 피하고 싶은 만큼
그 아쉬움이 마음에 맴돈다.
간절함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피규어와 문화유산의 차이는 간절함의 농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