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DC* 2007 행사에서 스티브 잡스가 첫 아이폰을 소개하는 장면은 전설의 프레젠테이션이라 불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 발표에 수많은 트릭과 거짓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당시 대부분의 기업들이 사전에 녹화된 영상을 사용하던 것과 달리, 스티브 잡스는 실시간 프레젠테이션을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첫 아이폰을 발표하기로 예정된 행사까지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준비하기 어려웠던 스티브 잡스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기로 결정합니다.
*WWDC : Worldwide Developers Conference (애플의 개발자 콘퍼런스)
우선, 개발팀과 합을 맞추어 오작동을 최소화할 수 있는 순서를 정했습니다. 또한, 불안한 인터넷 송수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T&T에서 이동형 기지국을 임대해 오는 것도 모자라, 신호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신호 강도 표시가 항상 가득 차 있도록 디스플레이 값을 고정시켜 놓았습니다. 이는 무선 네트워크에 문제가 없다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모리 용량이 128MB에 불과해 하나의 스마트폰에서 여러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할 수 없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러 대의 아이폰을 활용해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갔습니다. 이처럼 변수가 많았기 때문에 잡스는 5일 동안이나 리허설을 진행하며 연출에 큰 공을 들였고 결과적으로는 큰 실수 없이 마무리되며 스마트폰의 대변혁을 이끄는 계기가 됐습니다.
갑자기 이 이야기는 왜 하냐고요? 올해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AI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2023년을 지나, 2024년에도 여전히 테크 업계의 최대 화두는 AI입니다. 엔비디아의 GTC, 구글의 I/O, 마이크로소프트의 Build 등 주요 테크 기업들은 저마다의 개발자 콘퍼런스를 통해 자신들의 AI 기술력을 자랑하며 경쟁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주요 기업들의 발표가 대부분 마무리된 지금, 마지막으로 발표를 준비하고 있는 애플의 WWDC로 시선이 모이고 있습니다.
작년에 모든 기업이 'AI First'를 외치는 와중에도 애플은 WWDC에서 AI라는 단어를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공간컴퓨팅의 시대를 열겠다'며 새롭게 꺼내든 라인업 '비전프로(Vision Pro)'을 힘주어 발표했습니다. 애플의 이러한 행보를 두고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애플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AI FOMO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갈 길을 가며 결국 트렌드를 선도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생성형 AI의 흐름은 생각보다 거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기술에 제대로 힘을 주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시가 총액 1위 자리를 내주게 됐습니다. 강조했던 비전프로 역시 예상보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트렌드를 이끌려했던 애플이 오히려 트렌드를 놓친 격이 됐습니다. 이로 인해 언제나 최고의 모습만 보여주던 애플의 자존심에 금이 갔고, 많은 사람들은 애플이 이번 WWDC를 통해 만회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요. 평소의 애플이라면 이러한 시선을 즐겼겠지만, 이번에는 여간 부담이 아닙니다.
6월 10일부터 14일까지 예정된 WWDC가 다가올수록 애플은 기대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신기술에 대한 밑밥을 하나둘씩 풀고 있는데요. 애플 걱정을 하는 건 아니라고(?) 배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번 발표가 다음의 이유들로 인해 다소 우려가 됩니다.
첫째, 경쟁 기업들의 개발자 콘퍼런스 수준이 매우 높았습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로봇군단을 대동해 마치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반응을 이끌어냈고, 구글은 OpenAI에 버금가는 AI 기술력을 자사 플랫폼 생태계 전반에 통합했으며, 마이크로소프트는 '코파일럿+ PC'라는 브랜드로 맥북에 정면 승부를 걸었습니다. 저마다 박수받기에 부족함 없는 발표였고, 애플이 이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곱절의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애플은 기술 대결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사실 애플은 그동안 기술이 제품보다 앞서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는데요. 이는 기술 대결로 이어지고 있는 최근 트렌드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비스를 앞세우자니 기술력에 대한 의심을 받을 수 있고, 기술을 앞세우자니 기존 이미지에 반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습니다.
셋째, 시간이 부족합니다. 속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대외적으로 애플이 AI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말에서야 본격적으로 AI 스타트업들을 인수하기 시작했고, 가장 중요한 OpenAI와의 협상도 최근에서야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기술의 적용 난이도가 높은 만큼 이들의 기술을 서비스화 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스티브 잡스가 왜 거짓말을 했을까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당시 휴대전화 업계는 노키아, 블랙베리 등의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고, 스마트폰이라는 개념은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애플은 이들 사이에서 혁신을 통해 차별화해야 했고,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진 않지만 시기상 더 미루면 격차가 더 벌어질 것으로 판단해 위험을 감수하고 승부수를 던진 것입니다.
그때와 지금 애플의 상황이 완벽하게 비슷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도전이 많은 상황임에는 분명합니다. 애플이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기 시작한 이후 수십 년 동안 애플은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금 대중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아이폰의 첫 번째 발표와 비견될 만한 발표가 필요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물론 과거와 같은 과장된 발표나 트릭을 활용할 확률은 낮아 보입니다. 과거의 애플에 비해 비해 잃을 것이 많아진 현재의 애플이며, 스티브 잡스와 달리 실리를 추구하는 팀 쿡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예전과 같은 강한 도박을 걸진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팀 쿡은 팀 쿡만의 방식으로 완벽을 추구한 상태에서 다양한 발표를 이어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또한 분명 놀라운 발표의 연속이 될 것은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어쩐지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이 그리운 건 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