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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Mar 06. 2024

초희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결국 인생은 선택의 문제다

‘우연’, 사전을 검색해 봤다. 짝 우에 그럴 연, 자연히 짝을 이룬다는 뜻. 나와 짝을 이룬 건 무어가 있을까. 멀지 않아 나오는 답. 조선.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이는 고개를 아마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조선? 그래, 맞아요. 그 고리고짝 옛날 옛적의 그 나라 이야기하는 거. 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를 떠올리는 이도 간혹 있을 테지만. 조선이라는 발음이 혀를 비집고 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질 때의 그 뻘쭘함. 오래 겪다 보면 뻘쭘함도 나름의 자랑거리가 된다. 그만큼 유니크하다는 거니까.


조선이 나의 짝꿍이 된 게 언제인지,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나마 생생한 기억은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 고등학교 시절, 쫓아오는 선생님을 등지고 실내화 가방도 저 멀리 던져둔 채 오로지 드라마 동이를 보기 위해 야자를 땡땡이친 날. 숨 가쁘게 전력 질주하던 어느 캄캄한 밤이다. 고증에 맞지 않는 자주색 곤룡포를 입고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지진희가 연기하는 숙종이 나오는 드라마.


지금은 타인의 존재에 심각할 정도로 무신경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릴 적 나는 타인이 풍기는 사소한 기류 한 줌에도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아이였다. 친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적당히 섞여 들어가 어울리다가도 틈만 나면 툭 떨어져 나와 혼자만의 시간에 빠졌다. 시끄러운 교실 속 홀로 책에 파묻혀 있던 시간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즐겨 읽던 책은 해리포터 시리즈. 다른 책도 읽어 보기를 권하는 엄마의 진지한 손 편지를 받을 정도로 아주 깊이, 푹 빠져 있었다. 아즈카반의 죄수는 5번을 넘게 읽어서 책등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그때의 나는 빗자루로 하늘을 나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라 하는 진지한 초딩의 관심사는 아직 조선에 있지 않았다. 저 반대편 섬나라에 있던 관심이 반도로 넘어온 건 어째서였을까.


검은 밤, 홀로 깨어 있었다. 그날 신발장에 아빠의 신발이 없다는 사실이 왜 그리도 서러웠는지,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혹여 같이 자던 엄마와 동생이 깰까 숨죽여 우느라고 코도 휑 풀지 못한 채 끅끅 소리를 냈다. 왼쪽 코가 막히면 오른쪽으로, 오른쪽이 차면 다시 왼쪽으로 홀로 긴긴밤을 뒤척이던 차였다. 달빛에 어슴푸레 비치는 엄마의 얼굴이 보인다. 모든 신경을 놓은 채 힘이 쭉 빠져 있는 얼굴에도 고단함은 끈질기게 묻어 있다. 그 시절 엄마는 큰길만 한 번 건너면 있는 동네 큰 병원 식당에 일을 갔다.


그때의 난 유독 늦게 잠이 들었고, 엄마의 하루는 너무 이르게 시작되었다. 어느 날은 가까스로 곤히 잠들었는데 흔들어 깨우는 엄마 때문에 짜증이 치솟았다. 엄마는 새벽에 나가면서도 자식들 밥은 꼭 챙겼다. 예상치 못한 늦잠에 엄마는 압력솥 시간을 놓쳤던 거였다. 눈을 비비며 달아난 잠을 내내 아쉬워하고 있는 내게 엄마는 칙- 압력솥이 공기를 토하면 가스 불을 꺼라 단단히 이른다. 현관문을 연 엄마의 입에서 하얀 김이 잔뜩 새어 나온다. 잠옷 차림의 나는 몸을 움츠린 채 새벽을 뚫고 나가야 하는 게 내가 아니고 엄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두 세 시간 남짓한 시간이 고작이었지만 단잠을 잔다. 주섬 주섬 교복을 입고 학교에 나선다. 꼬깃 꼬깃한 교복은 일전에 세탁기를 잘못 돌렸기 때문이다. 힘든 엄마를 도와 준다는 기특한 발상이었지만 드라이 크리닝용 옷이 따로 있다는 걸 중학교에 갓 입학한 시절의 난 알지 못했다.


서러운 날이 이어졌다. 해가 유난히 밝다 싶은 날이었다. 그날 엄마는 일에 가질 않았다. 휴일이었던 건지 , 아니면 다른 일이 있었던 건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가 집에 있어 신이 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벨이 매섭게 울렸다. 매섭다고 한 이유는 미처 응하기도 전에 신경질적인 벨소리가 연이어 울려댔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문을 덜컥 열었다. 작은 체구였지만 깡다구가 꽤나 있어 보이는 사나운 눈매의 어른 남녀가 씩씩이며 들어왔다. 돈을 내놓으란다. 그들은 무턱대고 남의 부엌에 앉아 성난 시위를 시작했다. 덩달아 성난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덤볐다. 엄마는 만류했다. 어른에게 그러는 거 아니라고. 어디서 본 건 있었는지 어린 나는 대번에 대꾸했다. 어른다워야 어른 대접을 해 준다고. 가만히 서 있는데도 심장이 그렇게나 쿵쿵 울릴 수 있구나, 새삼 알았다. 어른 남녀의 결말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뇌리에 박힌 장면은 딱 거기에서 멈춰 있다.


돈이란 게 참 무서웠다. 돈이 무서워 잠적한 아빠는 끊임없이 무서운 일을 몰고 왔다. 어느 날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두 명이 집에 들었다. 말로만 듣던 새빨간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이었다. 드라마 속의 흔한 장면처럼 물건을 부수거나 큰소리를 내진 않았다. 어쩔 줄 몰라하며 서 있던 나에게 아저씨는 무언의 동정을 보냈다. 그는 조심 조심 걸으며 애써 보이지도 않는 구석진 곳을 찾아 딱지를 붙였다. 끔찍한 일을 하러 온 사람이 그렇게나 착하게 구니 마음이 더욱 갈 곳을 잃었다.


밤마다 잠든 엄마 곁에서 이어폰을 꼽고 라디오를 들었다. 어느 날은 DJ가 귀를 의심할 정도로 이상한 제목의 노래를 소개해 주었다. “공자의 아들”. 세상만사에 해탈한 듯한 힘 빠진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음률에 맞추어 가사를 내뱉었다. 노래라고 하기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잔잔한 말씨였다. 공자의 아들이 들려준 사연은 이랬다. 유명한 아버지를 둔 자신은 세상이 너무도 힘들다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아버지라는 꼬리표가 붙는다고. 세상의 커다란 기대 때문에 자신은 날마다 한없이 작아진다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나 멋진 아빠를 두고 자신이 못나 보인다고 어리광을 잔뜩 부리다니, 참 호강에 겨웠다고.


한편으로는 시시한 생각도 들었다. 공자라면, 언제 적 사람이지? 굉장히 옛날 사람인 건 분명했다. 그렇게나 옛날에도 사람들의 고민은 요즘의 우리와 비슷하구나. 물론, 노래말은 허구의 이야기였지만 참 그럴싸해 보였다.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옛 사람의 이야기에 일상을 비추어 보기 시작한 건. 이미 죽어버려 세상 저 편에 넘어 간 사람들은 이토록 고된 세상의 비밀을 알 것만 같았다.


그날 후로 역사 교과서를 유심히 읽어 내리곤 했다. 공자에서 시작된 관심이 공자를 숭앙하는 나라에까지 닿았다. 눈길을 끈 건 그 나라가 망해가는 시점이었다. 왕은 제 역할을 못했고, 권력을 가진 이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수탈해 갔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가지지 못한 자들은 권력자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의 처지를 어여삐 여기며 너도나도 권력을 갖게 되기를 꿈꿨다. 신분 상승을 향한 욕망이 폭발하던 그 시기에는 이미 가진자와 가지게 된 자와 여전히 가지지 못한자들의 각축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염증이 일었다. 몇 백 년 전 이들이 살던 세상과 오늘날 내가 사는 세상이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또 다른 선택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부를 쌓은 누군가는 신분을 사는 데는 눈꼽만치의 관심도 없었다. 미천한 자신의 신분이 아무렇지 않았던 그는 주변의 가난을 오히려 불편해 했다. 그는 곧 자신의 지척에 사는 어려운 이들에게 날마다 먹을 걸 내 주었다. 명성이 얼마나 자자하였던지 어느날 왕은 그를 서울로 불렀다. 공자왈 맹자왈 하던 그 시대에 태어난 여성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왕의 앞으로 당당히 나아간 그는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했다. 금강산을 여행하고 싶다고. 거주 이전의 자유가 드물던 그때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요구였다. 그렇게 그는 잔뜩 쌓은 부와 명성을 지닌 채 평생의 소원이던 금강산의 절경 속에서 마음껏 취했다.


수 백 년의 세월 속에 숱한 생의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유독 마음이 힘든 날이면 생의 조각들 속에 잠겨 끊임없이 뒤채였다. 그러고 얼마간 지나 보니 언뜻 참 살만하다 여겨지는 날도 찾아왔다. 결국 삶이라는 게 지나치게 요란스러워 보여도 진리는 참 산뜻했다. 어떠한 생의 조각을 집어들 것인지, 어떠한 이야기를 부여잡고 다가올 내 미래로 상상해 갈 것인지. 결국,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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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희는 제 필명입니다.

조선 시대 쉬운 말로 K POP의 원류라고도 볼 수 있는 허난설헌의 본명이지요.

개방적인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난 그는 어릴 적부터 글짓기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결혼 후에 예기치 못한 불행을 연이어 겪다가 결국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홍길동전을 쓴 것으로 유명한 허균은 허난설헌의 남동생이었습니다.

누나의 생이 안타까웠던 그는 누나의 글이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는 게 서러워

중국 여기저기에 누이의 글을 알립니다. 중국인들은 하나같이 다 감탄했습니다.

그 덕분에 허난설헌은 죽어서 더 유명해졌습니다.


그렇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는 글을 쓰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모진 생들로만 가득 차 있다고 여길 때에도

이렇게 분명한 희망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가끔 마음을 참 따스하게 하는 것 같아요.


그런 희망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필명을 정했습니다. :)


독자 분들도 아무리 컴컴한 시기를 마주하시더라도

꼭 희망을 상상해 내시기를, 그렇게 지나고 나면 또 한껏 괜찮아지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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