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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May 31. 2024

묵호

꿈 같은 길을 달려 이른 곳은 묵호였다. 먹 묵에 호수 호. 이름을 참 잘 지었다 싶었다. 서울에서 두 시간 남짓 멀어졌을 뿐인데 검푸른 바다가 차창을 가득 메웠다. 선로를 따라 넘실대는 광활한 물결이 신비로웠다. 이질적인 풍경에 마음이 널뛰기하듯 붕붕 떠올랐다.


-초희아, 우리 바다에 갈래?


어디에 가서 무얼해야 하나 망설이던 찰나에 갑작스레 훅 들어온 제안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천진한 긍정의 말이 떠올랐다. 아주 조그마한 걸 결정할 때에도 자칫하면 손해를 볼까 두려워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지나치게 뜸을 들이는 성미인데 그날은 유독 결정이 쉬웠다.


-그래, 가보자.


해가 질 무렵 도착한 묵호는 온통 푸르렀다. 수평선을 사이로 명암이 서로 다른 푸른 빛이 위 아래로 뒤섞여 있었다. 산뜻한 광경에 늘 어딘가에 짓눌린 것처럼 움푹 꺼져있던 마음이 활짝 피었다. 쏴아- 시원한 소리에 맞춰 그동안 콱 막혀 있던 체증이 싹 가시는 것만 같았다.

푸른 배경 안에서 사랑하는 애와 술잔을 기울였다. 톡 쏘는 탄산이 목을 지나 찌르르 퍼졌다. 크- 절로 나오는 탄성에 기분 좋게 깔깔대며 웃었다. 생선 살은 입속에서 통통 튀어 올랐고, 매운탕의 육수는 얼큰하게 시원했다. 너 한잔, 나 한잔, 한껏 배를 불리고 나서야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려가 볼래?


바다를 따라 길게 나 있는 밧줄을 제치고 하얀 모래사장 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맑은 파도 속에 손을 가득 넣었다. 코끝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내음과 어울리는 촉감이었다. 어느덧 하늘은 바다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깜빡이는 통통배의 불빛만이 가까스로 바다의 정체를 밝히고 있었다. 평온한 바다를 보다가 문득 의아했다.


-나 밤바다 정말 무서워하는데, 너랑 있으니까 아무렇지 않은가 봐.


평소라면 느끼하다며 몸서리칠 만한 말들이 그 애와 함께 있다 보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낭만이 한가득이었다. 이렇게나 좋은 인생이라니, 경이로웠다. 저 끝없는 바다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생을 참 싫어하기만 했는데. 생을 좋아하도록 하는 게 사랑의 일인가 보다 싶었다.

사랑하는 애 주위로 등이 하나 둘 들어왔다. 빛이 길을 내주는 대로 발을 맞추며 나란히 걸었다. 맞닿은 어깨가 이따금 유쾌하게 씰룩였다. 하염 없이 걷다가 출출해지면 눈앞에 보이는 상점에 들었다. 너 한입, 나 한입, 번갈아 베어 물어 오물거리는 입 사이로 쉴새 없이 다채로운 이야기가 줄을 이었다. 어느새 똑 닮아 간 말씨에 서로만이 알고 있는 유머 코드를 담아 이야기들이 더욱 영글어 간다.

그렇게 그 애와 함께 걷다 보면 딱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지 않아도 좋아질 것 같다는 한없이 태평한 생각도 덩달아 떠올랐다. 먹을 온통 풀어 놓은 것 같이 얼룩덜룩했던 생이 더없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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