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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Jun 12. 2024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사랑으로 세상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 

잊었던 이름이었다. 윤동주.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 9. 자화상



컵에 쓰인 그의 시 구절이 문득 눈에 들었다. 오래 전 친동생이 생일 선물로 준 컵이었다. 별안간 마음이 먹먹해졌다. 과연 지금의 내 모든 선택들은 옳은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결국 삶의 현장은 이상적 사유의 단면조차 되지 못하는 것인지, 켜켜이 싸여 있는 악의 평범성 앞에 회의감은 더 없이 짙어졌다. 나조차도 위선적인 ‘악’에 불과할 뿐인데 고상한 척 혼자 유난을 떠는 건 아닌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살만 하다고 느끼다가도, 정처없는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질 때면 늘 애달픈 고민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 미웠다. 


타오르는 듯한 노을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그 길에 들른 서점에서 홀린 듯이 초판본과 똑같은 표지를 한 그의 시집을 샀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참 오랜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뜻 모르고 줄줄 외웠었던 문장들, 몇 십 년을 지나고 보니 문장의 자음과 모음 모두가 온통 마음을 후벼 파고 들어오는 듯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그는 무엇을 그리도 사랑하려 애썼던 걸까. 


어려운 시절을 살아낸 그는 늘 제 삶을 부끄러워했다. 태생과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마음껏 미워하고 차별하고 탄압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말 그대로 세상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나날 속에서도 그는 세상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무진 애를 썼다. 세상을 고운 말씨에 담아내고자 하는 꿈을 지키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럼에도 가끔은 그의 문장도 길을 잃었다. 이 말도 안되는 세상을 사랑으로 노래하려는 시도가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지. 너무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닌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 5. 십자가 



그는 무엇이 그리도 아팠던 걸까. 그저 시와 글을 쓰며 수수하게 살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눈에 보이는 세상은 그의 꿈을 파렴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여기고 싶었는데, 돌아보니 제가 한 일이라곤 그저 태평하게 앉아서 쓰고 또 쓴 것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제 옆에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나서서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이 그는 밉고 또 미웠을 테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문장 안에서라도 저 스스로를 단죄하고 싶었다. 


윤동주, 처참한 시절을 살아낸 그의 고민이 오늘날 청춘과 닮아 있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삶의 이유를 찾으려는 젊은 시절의 낭만이 애달플 수밖에 없는 건 만고의 진리인 걸까. 


그가 살았던 시절의 청춘과 오늘날의 청춘을 비견하는 건 어리석어 보일만큼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적어도 그때보다는 나은 한때를 보내고 있으니까, 


그런데 과연 그럴까. 보다 나아진 세상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그리고 나 자신을 미워하고 또 미워한다. 서로를 질타하고, 구분 지으면서, 나아가 결국엔 자신까지도 미워하면서 끊임없이 좇고 있는 게 무얼까. 나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자생하는 끝없는 욕망과 열망 속에 뒤채이면서 우리는 결국 서로의, 스스로의 목을 얽어맨다.  


저마다의 다른 환경과 상황 속에서 저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들, 저마다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치열하게 분초를 보내는 젊음들이 그의 문장과 한없이 겹쳐 보였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병원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의 이유를 젊은이는 알 수가 없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저 혼자만의 아픔을 홀로만 겪는다고 생각해 버릴 찰나, 젊은이의 시야에 한 여인이 들어온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쓸쓸한 여인에게 마음이 동한다. 여인의 고독에 저 스스로의 고통이 문득 겹쳐 보인다. 여인이 누웠던 자리에 모로 누워보며 젊은이는 간신히 안온을 찾는다. 연민의 외피를 입은 어렴풋한 사랑을 알아채는 순간, 젊은이의 세상은 간신히 살아봄직한 곳이 된다. 

윤동주의 시가 아름다움으로 이 세상에 남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시선이 비단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짧은 생애를 마칠 동안 자신의 젊음을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데 바쳤다. 아득히 멀기만 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윤동주 시집 초판본(출처: 국립한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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