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희 Jul 26. 2024

너와 나의 이해利害를 이해理解하기

사상검증구역 더커뮤니티를 보고 

‘이해’, 이로울 이 자와 해로울 해 자를 쓰는 이해의 말뜻은 말 그대로 ‘이로움과 해로움’. 나의 이로움이 모두의 이로움이 되기가 그렇게나 힘이 들까 싶은데 막상 생의 현장을 세세하게 들여다 보면 저마다의 이해관계가 어쩜 이리 촘촘히 다를 수 있을까, 놀라곤 한다. 그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게 된 건 최근 예능을 보면서였다. 



다양한 정치관을 갖고 있는 이들이 모여 벌이는 이념 전쟁 서바이벌 ‘더커뮤니티’.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고 하기엔 정치 뉴스를 열심히 보는 편도 아니고, 누구나 다 알법한 정치인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하기에 처음 이 예능을 접했을 때는 다소 심드렁했다. 

그런데 아뿔싸, 보다 보니 이마를 탁 치는 순간순간이 너무나 많았다. 도대체 저 ‘인간’은 왜 저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씩씩거리며 미운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다가도 그가 살아온 환경을 듣다 보면 어느새 그도 그럴 수 있겠다 끄덕이고 있는 자신이 참 신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너그러운 마음이 잠시 멈칫, 갈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토론 주제가 ’계급‘이었던 회차에서였다. 빈곤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는가, 사회에 있는가. 서민층과 부유층으로 나뉜 이들이 곧 저마다의 이해 속에서 토론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부유층은 ’개인‘이라고, 서민층은 ’사회‘라고 이구동성으로 답을 내놓지 않을까 했는데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팔뚝만한 쥐가 자주 출몰하는 단칸방에서 6명이 넘는 식구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D의 이야기였다. 항상 살아가는 일이 너무도 버거웠던 D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늘 생소했다. 생의 모진 파도에 휩쓸려 다니며 하루하루 생존하기에 바빠 늘 자신의 의지대로 선탁할 수 없는 순간순간만을 살았다. 그러던 D에게 어느날 꿈이 생겼다. 모난 바닥에서 태어난 생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위로 멋지게 올라가 서 보겠노라고. 그렇게 해서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난 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어 보겠다고. 


그런 D가 머물기로 마음 먹은 곳은 군이었다. 군에 간 D는 휴가를 나올 때면 여느 동료와 다르게 부모에게 용돈을 달라며 칭얼댈 일도, 태평하게 여자친구를 사귈 일도 없었다. 휴가날 대부분의 시간을 돈벌이를 하기 위해 노가다판에서 보내느니, 차라리 군에 말뚝을 박아 보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더구나 군은 여느 직업보다 진입 장벽이 낮았고, 부지런히 노력하기만 한다면 높디 높은 곳에 있는 ‘별’도 딸 수 있으니까. 그렇게 군에 남은 D는 매일 수십 키로가 넘는 군장을 매고 수 키로를 행군하는 호된 훈련을 마치고도 쉬는 법 없이 바로 헬스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늘 자신을 엄격하게 채근하고 몰아붙이면서 군에 존재하는 별은 모두 따보겠다는 듯이 척척 승진을 해냈다. 

진지하게 인터뷰를 이어가고 있는 D의 굳은 얼굴 곳곳에는 숱한 세월의 흔적이 서려 있는듯 했다. D는 주장했다. 계급은 개인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늘 남 탓과 사회 탓만을 할 수는 없다고. 심장을 저미는 것 같이 늘 힘이 들었던 생 속에서 D가 힘겹게 건져 올린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였다. 



비슷하듯 다른 생을 산 H는 또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H의 부모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뒤 바로 일터로 뛰어들었다. 하루하루 시장에서 고된 생계를 이어가며 항상 먹고 사는 문제에 허덕였지만, 그들은 늘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닮은 H는 자신의 생을 누군가의 사랑과 도움에 말미암은 기적이라고 여길 줄 알았다. 

그런데 대학에 가서 마주한 섬뜩한 현실은 그 선한 마음에 종종 재앙의 불씨를 놓곤 했다. H는 대학에서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일상을 일상처럼 살아가는 타인을 마주하며 자신의 ‘계층’을 서서히 깨달아 갔다. ‘생계’ 자체가 아닌 ‘문화’에 관심을 둘 수 있는 그들의 여유와 넘침을 바라보며 미처 몰랐던 자신의 결핍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H는 토론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삶의 현장을 겪어온 타인을 설득할 말을 모르겠다고. 마치 커다란 벽이 앞에 놓인 것만 같은 막막함이 든다고. 부유층을 애써 설득하기 위해 수치화된 빈곤의 지표를 찾아보며 H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계층’을 인지했다. 아, 나 참 빈곤했구나.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는데. 인터뷰를 하며 머쓱한 표정을 짓는 H의 눈에 곧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H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허리를 곧추 세웠다. 모두를 설득할 말을 고르는 H의 얼굴은 무척 신중해 보였다. ”빈곤 문제에 있어서 가장 답답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빈곤에 대한 논의가 너무 자주 빈곤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빈곤은 단순히 경제적인 부의 박탈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빈곤은 인간이 자신의 잠재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매우 다양하고 다면적인 방식으로 제한합니다.“

원치 않은 생의 불운을 겪어 온 H는 비슷하게 불운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해 사회와 싸우는 길을 택했다. 빈곤의 책임을 개인에게 물으려 하는 가혹하고 냉혹한 사회를 설득해 내기 위해, 계속해서 낮은 곳의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에는 겪어보지 않으면 새카맣게 모를, 이렇게나 말도 안되는 생을 살아내는 사람들도 있다며 외치고 외쳤다. 그렇게 H는 D와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의 생을 사랑하려 애쓰고 있었다.


토론은 결론이 나지 않은 채 흐지부지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계급’ 문제는 인류가 문명을 이룬 후 몇 천년이 지나도록 결코 끝나본 적이 없는 지난한 이야기이니까. 



그 뒤로도 더커뮤니티는 회차를 거듭하며 출연진들의 격차를 구체적으로 헤아려 볼 수 있는 다채로운 이야기에 살을 붙여 나갔다. 산유국 출신의 외국인 B는 태어나 한 번도 갖고 싶은 걸 가지지 못한 적이 없었던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한국에 건너와 유학 생활을 하던 중 본국의 상황이 나빠졌고, 치킨집에서 알바를 하며 처음으로 스스로가 피땀 흘려 번 돈을 써보게 되었다고, 그 맛이 참 달콤했다고 회상했다. B는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교훈적인 메시지로 자신의 이야기를 갈무리했다. 



비슷하게 부유한 삶을 살아온 J도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털어 놓았다. 사업을 하며 승승장구하던 아버지가 동료의 배신으로 한순간 빚더미에 앉았다. 형편이 어려워진 후 중국집에 외식을 나갔던 일을 회상하며 J는 눈시울을 붉혔다. 자신이 정말 정말 좋아하던 베이징 덕을 주문할 수 없었던 현실이 너무 괴로워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했다. 그 순간을 경험한 후로 세상은 돈이 전부라 여기며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왔노라 고백했다. 



출연진들의 다양한 서사에 귀를 기울이며 문득 예전에 인상 깊게 보았던 드라마 속 대사가 생각났다. 

“누구나 제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플 수 있어. 근데 심장이 뜯겨 나와본 사람 앞에서 아프단 소리는 말아야지.“




결국 불행은 더 한 불행으로 위로 받을 수 있는 것 뿐인 걸까? 삭막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B와 J가 겪은 고통은 고통이 아닐 수 있을까? 고통이라고 인정해 주기에는 J의 사연을 듣고있던 D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는 순간을 애써 외면할 수가 없다. 

그런데 D와 H의 사연을 들으며 저 정도 쯤이야, 코웃음을 치는 누군가도 있지는 않았을까. 그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는 그렇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까.


어지러운 세상 속에 위아래로 빼곡히 싸여 있는 겹겹의 이해들을 헤아려 보다가 금세 염증이 일었다. 




일그러진 삶들을 대체 어떠한 명징한 논리로 설명해 낼 수 있는 걸까.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이 스스로 생을 끊어내는 일보다 힘이 들었던 사람들을 어떻게. 

우리는 결국 서로의 다른 이해利害 속에서 서로를 이해理解하지 못한 채 지난한 생을 지나칠 수밖에 없는 걸까. 





마음이 너무도 괴로운 가운데, 문득 결이 다른 생각이 훅 스쳤다. 

나와 타인을 견주어 보며 어지러이 생들의 무게를 가늠해 보는 이 순간이야말로, 결국 생의 유일한 이유가 아닐까 하는.



나의 이해가 타인의 이해와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알아채는 순간, 그 순간에 이는 마음의 방황을 사랑으로 흐르게 할 수만 있다면. 





사랑, ’어떠한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다.’

사랑의 목적어는 타인이다. 

사랑은 스스로의 이해利害가 아닌 타인을 향한 이해理解에서 오롯이 시작될 수 있다. 



이해의 다른 말 Understand, 

생의 유일한 이유인 사랑은 결국 세상의 제일 낮은 곳에 있었음을.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이 끝내 그 사실을 알아챌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생을 나는 그렇게 간신히 풀이해 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