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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비둘기이다

by 초희

오랜만에 각진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하늘은 희뿌옇게 낀 먼지 덕에 애매하게 파랬다. 그래도 간만에 햇빛을 쐬니 한껏 마음이 들뜨는 듯도 했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다시 한 번 예상 질문을 되뇌이며 이런 저런 답변을 속으로 해 본다. 그러다 앞 유리에 비친 얼굴을 보고 문득 소스라쳤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종종거리느라 잔뜩 날이 서 있는 표정.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표정을 풀어 본다.


이른 오후였지만 길가에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어디를 저리 바삐 가고 있는 걸까. 의외의 시간대, 의외의 장소에 사람들이 빈틈없이 꽉꽉 들어 차 있는 걸 보면, 항상 조금은 갑갑한 마음이 된다. 부산한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린다. 한강을 건너는 빨간 버스들은 늘 오래 기다려야만 한다. 차가운 공기에 비해 여직 햇빛은 타는 듯이 뜨겁다. 그늘로 피신하니 지척에 비둘기들이 수두룩했다. 잰걸음으로 길가에 흩어진 부스러기를 부지런히 주워 먹는 그들. 생을 향한 치열한 몸부림을 넋놓고 보고 있다 보니 어느새 버스가 왔다.


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는다. 귀는 이어폰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듣느라, 입은 다시금 면접을 준비하느라 바빠진다. 난생 처음 알게 된 회사를 오래 알은 채 하기에는 많은 공력이 필요하다. 한 달에 한 번 통장에 찍히는 200내지 300의 수를 얻어 내기 위한 처절한 노력. 뭐, 어쩔 수 없다. 삶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내가 사는 도시는 스스로의 존재를 숫자로 증명하기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는 이들로 늘 가득 차 있다.


색이 바란 하늘과 불그스름한 나무들을 한참 지나 드디어 파주에 이르렀다. 바짝 경직된 마음을 이고 지고 회백색 건물로 들어섰다. 공사가 아직 덜 끝난 듯한 건물 1층은 어우선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꼭대기 층에 들어서니 각자의 일로 부산해 보이는 사람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속눈썹을 힘껏 치켜 올린 인사팀 직원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 호의를 실망시키지 않고자 곧장 예바른 말씨로 알겠다고 답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이 이리도 많은데, 사무실은 찬물을 끼얹은듯 조용했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말이 없는 걸까.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오늘 내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할 상대의 모습이 힐끔 보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대표는 마른 몸매와 짧은 머리에 멋들어진 안경을 쓰고 있었다. 숏컷을 한 여성을 보면 이유 없는 호의가 싹트곤 했기에, 나쁘지 않은 시작이라 여겼다.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면접관이라곤 대표 한 명이 전부였다. 게다가 벽에 때묻지 않은 책들이 질서정연하게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방도 대표의 방임에 틀림이 없었다.


면접의 시작은 으레 1분 자기소개였기에 외운 문장들을 쏟아낼 준비를 하며 쭈뼛 앉아 있었는데, 대표는 대뜸 동화책을 만들어 보았냐고 물었다. 답할 새도 없이 한 달에 한 권씩 만들 건데 감당할 수 있느냐고도 물었다. 타사에서 히트를 치면 잽싸게 따라 붙어야 되기 때문에 출간 기간에 여유를 둘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말 마디 몇 개에 이 회사의 경영 철학이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보였다. 사람을 부품으로 쓰는 곳. 그렇게 달아 없어진 부품이 몇이나 될까.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중고 신입답게 예의를 잃진 않았다. 차분한 말씨로 답변을 이어가려는데 난데없이 테이블 위로 강아지가 튀어 올라왔다. 사람보단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처럼 황당한 등장은 썩 반갑지 않았다. 대표는 미안하다며 강아지를 서둘러 사무실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고는 다시 차분히 앉아 내 대답을 듣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말을 끊고 목이 마르지 않냐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가 자리를 뜬 사이에 파티션 안에 몸을 숨기고 일하고 있는 이들을 힐끔 살폈다. 저 맹한 눈빛들을 어디서 봤더라. 문득 맹렬한 햇빛 아래 정신없이 땅을 쏘아대던 그들이 생각났다.


종이컵을 넘겨 준 대표는 그 뒤로도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고는 중간에 갑자기 들어온 부장에게 바통을 넘겨 준 뒤 다시 자리를 휙 떠나 버렸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부장의 태도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이번에 이런 기획으로 책을 만들 건데, 할 수 있겠냐는 물음이 전부였다. 사장님이 매출에 무척 민감해 하신다며 미간 사이를 찌푸리기도 했다. 순간 염증이 일었지만 꾹 참았다. 근 며칠 간의 노력을 허투루 흘러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내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믿었다.


얼렁뚱땅 시간은 그렇게 흘러 갔고, 면접비 2만원을 황망히 들고서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얼마간 빨간 버스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서 있었다. 하늘을 향해 두 손 가득 뻗고 애처로이 서 있는 저 불그스름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무얼 바라고 서 있나. 문득 허기가 졌다. 늘상 때가 되면 먹이고 재워야 하는 몸뚱어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집에 들어가기 전 정말 맛있는 케이크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2만원 아래의 가장 비싼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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