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라고 하기엔 볕이 꽤나 따가운 날이다. 자전거를 타고 부쩍 높아진 하늘을 가르고 있다. 페달을 밟는 발에 힘을 더 실어 본다. 늦었다. 큰일이다. 약속 시간에 늦는 선생을 학부모가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럴 듯한 핑계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냥 이실직고하기로 한다. 빨간 불 때문에 잠시 멈추어 선 찰나, 애타게 전화를 걸었다. 뚜두 연결음을 지나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여보세요.
앳된 목소리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지금 어머님 통화 어려우신가요?
-네, 지금 화장실 갔는데.
-아, 그래요? 미안한데 선생님이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을 거 같아서 어머님께 잘 전달해 줄래요?
-네.
분명한 어조의 대답에도 조금 찝찝했다. 미안한 뉘앙스를 가득 실은 목소리를 학부모에게 직접 전했어야 했는데. 우선 길을 더 재촉해 보기로 한다. 자전거를 급하게 반납한 뒤로는 총총 뜀박질로 너른 마당을 가로질렀다. 늦더위로 몸에 엉겨붙는 땀 때문에 이미 챙겨 입은 셔츠는 엉망이다. 아무리 뛰어도 도착지까지는 아직 한참이었다.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까의 그 아이였다.
-아, 선생님인데 아직 어머님 화장실에 계세요?
-네, 지금 통화 어려운데.
-그렇구나, 오늘 사람들이 국회 근방에서 시위를 하는 바람에 버스가 다른 곳에서 내려 줘서 조금 늦었어요.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려 주세요. 이따가 봐요.
-네.
한 달에 두어번 강사 일을 한다. 두 시간 정도 박물관을 돌며 아이들을 인솔하면 되었다. 학부모들은 그 두어 시간 동안 아이를 맡기고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어서 이러한 일일 클래스는 꽤나 인기가 좋았다. 한 번 보고 지나칠 사이는 늘 첫인상이 중요한데, 퍽 민망스러웠다. 게다가 오늘 수업을 진행할 국회의사당은 강사인 나에게도 꽤나 생경한 장소였다. 국회와의 인연은 부지가 넓어서 길을 헤매는 강사도 더러 있다는 관계자의 말을 듣고 최근에 사전 답사 차 와 본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뭐, 해내야지. 애써 허리를 꼿꼿하게 곧추세운 뒤 서둘러 문을 밀고 들어갔다.
수업은 국회 본당에 입장하는 것으로 시작될 예정이었다. 본당에 들어가려면 사전 예약은 필수이며 입장 전에는 신분증 검사도 받아야 했다. 도착을 알리는 전화는 다시 아이가 받았다. 그쯤되니 조금은 의아했다. 화장실에 가신 어머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의문은 오래 지나지 않아 풀렸다.
오늘 인솔할 아이들은 두 명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을 지나고 있는 남자 아이 둘. 그 또래가 으레 그렇듯 아이들은 낯을 가리며 온몸을 쭈뼛거렸다. 아이들을 뒤로 하고 어머님께 다시 늦은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런데 그에 응하는 어머님의 말씨가 유독 어눌했다. 다문화 가정이구나. 어머님의 말은 알아 듣기 어려울 정도로 심히 뭉게져 있었으나, 의연하게 모두 알은 체를 했다.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처음 만난 선생을 조용히 지켜보던 아이들 마음에 조금이나마 생채기가 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머님과 헤어지고, 친해질겸 아이들에게 이런 저런 말을 걸었다. 말을 건네는 내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 시절 3년간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가르쳐 본 경험이 있었기에, 작고 사소한 것만으로도 그 애들이 주눅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님이 한국말을 참 잘하신다. 세찬이는 외국어 잘 해?
아이는 의아한듯 고개를 기울였다.
-저희 엄마 한국 사람인데.
-아 그래? 미안, 선생님은 외국 분인 줄 알았어.
-엄마가 귀가 잘 안들려서 그래요.
익숙한 듯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예상 외의 사실을 알게 된 나만 되려 안절부절이었다. 자연스러운 척 한다는 게 오히려 제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민망한 기색으로 세찬이 옆에 몸을 흐느적 거리며 서 있던 영웅이에게 애써 화제를 돌렸다.
쌍커풀이 없는 짙은 눈매를 가진 세찬이는 참 호기심이 많은 친구였다. 국회의사당에 꼭 와 보고 싶어 엄마에게 수업을 신청해 달라며 졸랐다고 한다. 제일 친한 친구 영웅이는 그런 자신에게 붙들려 끌려 왔다고 덧붙이며 자신만만해 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첫 만남의 소란은 여차저차 그렇게 잦아들고 있었다.
조금의 기다림 끝에 국회 직원의 인솔을 따라 본당으로 들어왔다. 2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본당의 모습은 흔히 뉴스에서 보아왔던 그대로였다. 맨 앞자리를 꿰찬 세찬이와 영웅이는 직원의 해설에 귀를 기울이는 성숙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제야 안정감을 찾은 나는 천천히 본당을 둘러 봤다. 국회의사장이 앉는 자리를 중심으로 빼곡한 좌석들이 크게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저 자리에 앉은 이들의 손짓 몇 번으로 우리 일상의 순간 순간들이 결정된다. 잘 모른다는 이유로 서울 교육감 선거를 흐지부지 흘려 보낸 부끄러운 과거가 문득 떠올라 조금은 숙연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직원의 해설이 끝나고, 본당을 나오려는데 세찬이가 옷깃을 잡아 끌었다.
-Y가 어디에 앉는지 확인해야 돼요.
-왜?
-그 사람은 나쁜놈이니까요.
의외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눈을 반짝이며 좌석 배치표를 살펴보던 세찬은 가장 중요한 목적을 이루었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몇몇 특정 어른들의 일상적인 언사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선생님, K가 누군지 알아요?
-아니, 누군데?
-검색해 봐요. 저희 할아버지인데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이를 실망시킬 수는 없었기에 짐짓 심각하게 폰을 들여다보는 척을 했다. 세찬의 할아버지는 경제 분야에서 꽤나 굵직한 자리를 맡고 있는듯 했다. 어린 나이의 세찬이 국회의사당에 유독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높디 높은 지위에 비해 세찬의 옷차림은 유독 남루해 보였다. 왜소한 몸으로 팔랑거리며 선생보다 앞서 걸어가는 세찬이 조금은 짠해 보였다. 대단한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감을 세우는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본당을 나와 국회박물관 쪽으로 걸었다. 그 짧은 거리에도 틈을 놓치지 않고 세찬과 영웅은 계속해서 서로에게 장난질을 해댔다.
-선생님, 우리 엄마는 돼지에요.
-어머님 되게 마르셨던데, 무슨 소리야?
-아니에요. 옷 속에 감춰 둔 살들이 어마어마해요.
-글쎄, 그런데 꼭 어머니가 마르셔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자신에게 쉬이 동조하지 않는 선생의 반응에 세찬은 입을 삐죽였다. 아이들은 사회가 맞춰 놓은 색안경으로 세상을 본다. 그런 탓에 아이들의 말은 종종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만 같다. 마침 수업 주제가 민주주의인데,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가르쳐야할까 문득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려와 달리 박물관에서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제 옷으로 바닥을 청소하겠다는 심산인건지, 가는 길마다 줄곧 몸을 누이고 뒹굴거리는 영웅이를 일으켜 세우느라 혼쭐이 났다. 그와중에 세찬이는 지칠줄 모르고 이런 저런 질문을 이어 갔다.
-선생님, 우리나라 국회는 몇년도에 처음 세워졌어요?
-글쎄, 선생님이 잠깐 기억이 안나는데 세찬이가 찾아보고 설명해 줄래?
아이들을 데리고 역사 수업을 하다 보면 만나는 단골 질문이다. 명징한 수에 대한 아이들의 집착은 학교에서 내 주는 오지선다형 문제를 풀어 보겠다는 집념이다. 그러한 질문을 만날 때마다 나는 애써 대답을 피한다. 중요한 건 늘어서 있는 수가 아니라 수의 행간 사이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는 우리네 같이 평범한 생을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라고, 늘 강조해 왔던 터였다. 그런데 이번 수업에는 이를 차근차근 설명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수업 후기에 쓸 아이들의 사진들을 찍느라 모든 전시실을 슥 스쳐지나가며 훑어 보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저 이승만 대통령이랑 사진 찍을래요.
여타의 진열장처럼 지나갈 찰나에 세찬이 걸음을 멈춰 세우며 간곡히 부탁했다. 백의민족을 상징하고 싶다는 듯이 새하얀 옷을 입은 이승만 마네킹이 도도한 눈길로 전방을 응시하며 우뚝 서 있었다. 그 옆에는 1950년 10월 16일차에 이승만이 표지로 실린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복사본도 자리하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를 들고 마네킹 옆에 신나게 선 아이들의 사진을 찍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타임에는 이승만이 당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내용이 크게 강조되어 있었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과 함께 찾아온 광복, 그 덕에 제 나라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 주요 인사들, 결국 실패로 돌아간 좌우 합작,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중간에 그어 놓은 38선, 그 선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정부를 세운 북한과 남한, 양쪽의 정치력을 공고하게 다지고자 일어난 전쟁, 전쟁 중 일본의 지원을 받기 위해 과거 제국주의 일본의 과오를 덮어 준 미국, 미군의 비율이 80%는 족히 넘는 유엔군을 앞세워 한국의 우방으로 우뚝 선 미국, 제3차 세계대전에 쓰일 무기들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한반도의 상공, 전쟁이 난 직후 기다렸다는듯이 부산으로 피신한 이승만, 서울은 무사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안심하며 서울에 남은 사람들, 뒤늦게 대통령의 도망 소식을 알고 피난길을 서두른 사람들, 불시에 폭파된 한강대교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그후로도 계속해서 죽고 죽고 또 죽은 사람들. 한뼘의 땅이라도 더 얻기 위해 펼쳐진 치열한 고지전, 그렇게 그어진 군사분계선, 그 와중에 산 사람들, 살아‘낸’ 사람들.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단음절로 뱉어낼 수 있는 숫자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지독히 긴 이야기들을 미처 다 할 수 없었다.
시간이 다 되었다. 오래 묵은 분노를 애써 친절한 미소 뒤로 넘기며 아이들에게 명랑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박물관 밖에는 아이들을 데리러 온 어머님이 총총 걸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눈을 빛내던 세찬이 꾸벅 인사를 했다. 어눌한 말씨로 재차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 어머님은 천방지축 아이들을 데리고 그렇게 점점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세찬아, 요즘 참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하고 있어.
제 존재를 미워하게 된 사람들은 생의 이유를 잃어버린 채 이제 새 생명도 잘 만들어 내지 않아.
나는 너가 이 다음에 커서 수를 외우느라 급급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숫자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발견해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모두 이 세상에 더 없을 유일무이한 저마다의 소중한 이야기였다는 사실도 알았으면 좋겠어.
너 자신과 세상을, 권위가 아닌 사랑으로 꽉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선생의 일이라는 게 그저 앞서先 살아낸生 세월 만큼 나이에 수를 더하는 일에 그쳐서는 안되는데, 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게 마음 속에만 남겨 두어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