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랑의 역사

차마 헤어지지 못하는 부모를 사랑하는 일

by 초희

1.

그 집엔 넓은 마당이 있었다. 철봉은 세 개. 그 중 가운데 것에 매달리는 걸 좋아했다. 거꾸로 매달려 혀를 삐쭉 내밀고는 거꾸로 보이는 엄마를 쳐다봤다. 하얀 눈이 가득 내리던 날 그렇게 엄마, 동생과 한바탕을 놀았다. 머리가 짧아 마치 남자 아이 같았던 내 동생은 아장아장 뛰어다녔다. 다리가 짧은 동생을 골리는 데 재미를 붙인 난 그 애가 날 따라잡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속력을 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한 유모차에 태우고 종종 외출했다. 총총한 눈으로 유모차를 끄는 엄마를 우리 둘은 물끄러미 올려다보곤 했다. 좁은 공간을 사이좋게 반반씩 나누어 가진 채 유모차의 진동에 넋 없이 흔들리며. 그 집의 넓은 마당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짧은 턱을 올라야 했다. 힘을 주어 유모차를 끌어올리던 젊은 엄마의 인상 쓴 얼굴 한 조각이 뇌리에 콕 박혀 있다.


하늘이 유독 회색이던 날, 다시 난 마당에 있었다. 어딜 갈 참이었던 건지 신이 난 채로 마당 이곳저곳을 쏘아 다니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아빠를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큼지막한 아빠 손을 잡으려고 냉큼 손을 뻗었는데, 아빠가 손사래를 쳤다. 아빠 손엔 담배가 뿌연 연기를 토하며 작은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


처음으로 정을 준 병아리도 그 집 마당 한 켠에 묻었다. 희멀건 노란 털들을 가진 그 병아리는 정수리만 유독 진한 주황색이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퍼 붇던 날, 작은 구덩이 안에 놓인 작은 존재를 웅크려 앉아 조용히 지켜보았다. 힘없이 뻗쳐 있는 두개의 다리가 떨어지는 빗방울에 닿을 때마다 힘없이 흔들렸다. 병아리를 묻는 할머니의 손은 정 없이 빠르기만 했는데, 그 광경에 설명할 수 없는 초라함이 어렴풋이 서려 있었다. 그 날은 꽤 긴 시간 동안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그 집에서의 기억은 그렇게 두서가 없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조각조각 난 기억들이 내 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유년의 눈은 세상의 윤곽을 또렷하게 볼 수 없기에, 그 시절의 기억은 그렇게나 앞뒤가 없는 지도 모른다.



2.

세상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억하기 시작한 건 그 집을 나오면서부터였다. 두 번째 집은 그 집의 길 건너편에 있었던 할머니 집이었다. 반지하에 좁은 방이 3개 딸려 있던 할머니 집에서 우리 가족은 두 번째로 큰 방을 쓰게 되었다. 제일 큰 방은 할머니와 결혼하지 않은 삼촌이 썼다. 좁은 공간 속에 온 가족이 몸을 잔뜩 맞대고 자던 날, 나는 더 이상 너른 방에서 동생과 단둘이 자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홍등을 켜둔 채 잠이 절로 올 때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던, 옛 그 집에서의 나날들이 어린 나에게는 유일한 걱정이었다. 이제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마음 놓고 잠을 청할 수 있으니, 오랜 날의 체증이 쑥 내려간 것 같았다.


이사를 온 뒤로 아빠가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해가 밝은 오후에도 아빠와 놀 수 있다는 사실에 자주 신이 났다. 그런데 아빠는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침울한 그 얼굴에는 늘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아노 학원을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아빠를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는데 아빠는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서둘러 택시를 탔다. 서둘러 택시에 오르던 아빠는 엄마에게는 비밀이라며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렇게 비밀이 많아진 아빠는 하루하루 더욱 시들어 갔다. 어느 날 밤에는 친척들이 갑작스레 찾아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질러댔다. 큰엄마는 우리 가족이 살던 방의 장롱을 벌컥 열며 아빠의 행방을 물었다. 큰 방 건조대 옆에 웅크린 채 숨어 있던 아빠를 마침내 발견한 건 큰아빠였다. 나와 내 동생은 삼촌 뒤로 삐죽 서서 생경한 광경에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불분명하게 들리는 성난 말씨 사이사이에서 자주 ‘돈‘이 등장했다. 큰아빠와 큰엄마의 소란은 새벽 내내 계속되었고, 작은 방에 누운 난 귀를 쫑긋 세운 채 오지 않는 잠을 기다렸다.


여러 날이 지나고 그 밤의 기억이 흐릿해져 갈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에 들어갔을 짝꿍 남자 애와 유독 친하게 지냈다. 그 애와 난 하교 길에 자주 숨바꼭질을 했다. 어느 날엔가 마른 목을 축이려 잠깐 그 애 집으로 갔다. 깨끗한 화장실을 가진 널찍한 집이었다. 나를 초대해 준 그 애의 성의가 고마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 앨 우리 집으로 데려갔다. 반 층을 내려 가 문을 열었는데 여느 때처럼 아빠가 있었다. 그 무렵 난 키가 무척 큰 아빠를 꽤나 멋지게 여기고 있었다. 멀찍이 티비를 보고 있었던 아빠를 자랑스레 그 애에게 소개해 주고는, 얼마간 좁은 집 안을 함께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 애가 돌아간 뒤, 아빠는 긴 시간 나를 붙잡아 둔 채 지하에서 사는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둥의 이야길 했다. 그 뒤로 난 친구들을 두 번 다시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낮은 집에서 사는 걸 부끄러워하는 아빠와 다르게, 나는 새로운 집을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작은 창 너머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문득문득 보이는 것도 정겨웠고, 종종 초록색 떼 수건으로 개운하게 날 씻겨 주는 할머니와 같이 사는 것도 좋았다. 넷에서 여섯으로 늘어난 식구가 드물게 다 같이 외식을 갈 때면 빈 집에 벌레 잡는 탄을 터뜨리곤 했는데, 그것도 우리만의 작은 축제같이 여겨졌다. 집을 나온 나는 설치해 놓은 탄들이 빈집 여기저기에서 폭죽처럼 터질 것을 그려보며 설레곤 했다.


새 집에서의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어 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아빠와 나, 그리고 동생이 하릴없이 티비를 보고 있던 날이었다. 한창 좋아하는 만화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대뜸 아빠가 잔심부름을 시켰다. 중요한 장면을 놓칠 세라 날름 물을 떠서 아빠 옆에 두었다. 그 뒤의 시간은 마치 천둥처럼 지나갔다. 아빠는 도망가는 나를 끝까지 매섭게 쫓아오며 때려댔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숨을 헐떡이며 끝없이 손과 발을 아무렇게나 뻗쳐대는 아빠가 마치 외계에서 온 생명체만 같았다. 오로지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경한 공포 때문에 오래 달리기를 한 듯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러다가 현관 옆에 놓인 철장에 팔을 세게 부딪쳤는데 머지않아 보랏빛 멍이 피어올랐다. 그 뒤로도 그런 비슷한 일들은 종종 벌어졌다. 내가 자주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아빠는 말했다. 그 날 난 병아리를 땅에 묻어 주었을 때보다 더 서럽게, 오래 울었다.



3.

아빠의 말이 되도 않는 말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한 건 반지하 집을 떠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집으로 옮겨 다니면서였다.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쫓겨나듯 점점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떠나게 될 때마다 세상을 보는 내 시야는 점차 또렷해졌다. 난생 처음 스스로의 알몸을 눈치 챈 아담과 이브처럼, 서서히 제 처지를 자각하게 된 밝은 눈은 이곳저곳을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알게 되는 게 많아질수록 아빠의 손을 대뜸 잡고 싶어질 만큼 그를 순수하게 좋아했던 어린 마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갔다. 같은 집에 살며 어쩔 수 없이 단둘이 있게 되는 상황을 마주하면 마치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더없이 어색하게 굴었다.


그렇게 멀어지는 나와 아빠의 사이에서 엄마는 수수한 방관자로 일관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가 엄마를 손찌검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은연중에 그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겼다. 최악과 차악 사이의 차이가 비록 간발이라고 해도, 그 조금의 차이가 주는 위안 덕분에 모두의 삶이 파멸에 이르지는 않았으니까.


심지어 얄궂게도 늘 안 좋은 날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빠는 돈이 생길 때마다 가족을 데리고 자동차의 타이어가 닳도록 이리저리 여행을 다녔다. 돈을 아낌없이 쓰고 있는 와중에는 꽤나 행복한 가정에 속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보며 천연덕스럽게 웃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웃음마저 깨끗이 사라지게 된 건 그 돈의 실체를 알게 된 후부터였다. 아빠는 남의 돈을 제 돈처럼 펑펑 쓰는 데 소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빚쟁이에게 쫓기게 될 때마다 학생이었던 난 종종 선생님들에게 급식비 연체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들의 태도는 몹쓸 말을 하는 것처럼 유독 조심스러웠다. 아빠는 그러한 미안한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사과를 하는 대신, 다시금 날 샌드백처럼 아무렇게나 여겼다. 그 때 알았다. 부끄러워해야 할 건 반지하나 연체된 급식비가 아니라, 반지하에 살거나 돈이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일그러진 자존심이라는 사실을.


그런 구린 자존심을 가진 아빠를 둔 덕분에 나는 재빨리 어른이 되었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삶을 일구는 방법을 어서 깨우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도망친 곳이 끝내는 책이어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생이라고, 지금에 이른 나는 종종 가슴을 쓸어내린다.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과 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나를 아빠는 미워하면서도 자랑스러워했다. 조금이나마 심기가 어지러운 날이면 난 대가리만 큰 못된 딸년이 되었고, 밖에 나가 자신의 위신을 곧추세워야 할 때면 난 자랑스러운 큰딸이 되었다. 그러다 가끔 아빠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스스로의 삶을 안쓰럽게 여기며 우수에 젖곤 했다. 그럴 때마다 술을 진창 마시고 못난이가 되어서는 내 앞에서 자신의 내리사랑을 긴 시간 늘어놓기도 했다.



4.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20여 년을 한지붕 아래에서 살았다. 그 집을 마침내 박차고 나왔을 때 난 긴 가방끈이 무색하게도, 월세나 전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였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배운 건 오로지 몇 백 년, 몇 천 년 전의 삶들뿐이라, 살을 맞대고 살아야하는 현실에는 까막눈일 수밖에 없다는 게 웃기지만 웃기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역사를 전공으로 고른 이유는 그나마 상황이 좋을 때 가족들과 함께 국내 이곳저곳을 여행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지금까지의 내 삶이 무슨 블랙코미디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나, 살아야지. 이렇게 저렇게 온몸으로 부딪히며 알게 된 세상은 생각보다도 더 혹독했다.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살아온 날들이 꽤나 불온한 것이었음을 다시금 새롭게 알게 되기도 했다. 더없이 안온한 환경에서 자라온 이들을 만나면 그들을 한없이 부러워하기도 했고, 그런 그들이 삶이 힘들다고 한탄이라도 할 때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다 나보다도 더 못한 생을 지나온 것만 같은 이들을 만나면 마음이 더없이 시렸다. 지나온 스스로의 불행과 언뜻 비춰 보이는 그들의 불행을 견주어 보며, 존재를 부정하는 험한 말들을 입에 담기도 했다. 이유 없는 생의 격차를 무어라 설명할 길을 못 찾을 때마다 그렇게 주어진 생을 한층 더 미워하기 바빴다.


그래도 삶이라는 건 그저 시간에 따라 생겨난 그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름대로 그럴 듯한 의미가 속속 생겨난다는 게 퍽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 정신없는 중에도 엄마와 아빠는 잊을 만 하면 나를 더 정신없게 했다. 그들에게 불현듯 전화라도 올 때면 심장은 멎을 듯이 쿵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려나. 고작 한 움큼의 살아온 정 때문에 모질게 연을 끊어낼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난, 나처럼 어느 정도의 불행을 후련히 끊어낼 수도 없는 엄마의 더 한 불행을 연민하고 사랑하기도 했다.


요즘에도 난 너덜너덜해진 내 존재의 근원을 끊어내지 못한 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그럼에도 주어진 태생보다는 더 나은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여기며. 가끔은 눈부신 순간에 가슴 저리도록 행복해 하기도 하며. 이렇게 살 수 있는 데는 내 부모의 최상은 아니었어도, 그들 나름의 최선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사실도 가끔은 인정하며. 그렇게 간신히 스스로를 사랑하려 노력하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