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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굴굴 Mar 08. 2024

갱신

늦은 밤, 진도공용터미널에 내렸다. 서울을 떠나온 지 다섯 시간이 지난 뒤였다. 휴게소를 두 번 경유할 정도로 꽤 먼 길을 달렸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고, 조명이 꺼진 대합실을 벗어나자 찬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우리는 곧장 중심가로 향했다. 한적한 거리를 통과하면서 내일 타야 하는 대중교통의 배차를 다시 확인했다. 덤으로 주변에 들를 만한 맛집도 같이 검색했다. 양념게장이 좋을지, 고등어구이가 좋을지. 다음 날 점심 메뉴를 고르는 데 열중하다 보니 잠시나마 여행 온 기분이 나기도 했다. 곧이어 근방의 찜질방에 짐을 풀고 따뜻한 물에 몸을 녹였다. 새벽에 일어나려면 일찍 쉬어야 했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한참을 뒤척였다.


우리는 팽목으로 가는 차표를 끊었다. 김밥 한 줄로 허기를 달래고는 바로 버스에 올랐다. 삼월의 해는 아직 짧았다. 한 시간 남짓 이동하는 동안 푸르스름하게 아침이 밝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바깥을 바라보던 나는 우리의 목적지에 대해 생각했다. 팽목. 세월호 참사 삼주기를 앞두고 왠지 그곳에 가야 할 것 같았다.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아도, 기억을 아무리 다짐해도 닿지 않는 부채감이 있었다. SNS에 그런 심경을 써서 올렸더니 몇몇 친구들이 화답해 기꺼이 동행이 되어 주었다. 간단히 읽을 자료를 준비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직접 보고 듣는 게 중요할 듯해 욕심을 거두었다.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궁금했다.


정류장에 도착하자 바닷바람이 서늘하게 불었다. 전날 선체 인양 계획이 발표되고 취소된 탓에 취재를 나온 기자도 여럿 보였다. 그중 일부는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사 지점과 가까운 동거차도로 들어간다고 했다. 일정에 여유가 있으면 함께했을 텐데, 그 대신 우리는 저만치 빨간 등대까지 천천히 걸었다. 바닥에는 노랗게 색칠한 조약돌이 밟혔다. 둑길을 따라 양옆으로는 사람들이 새긴 그림과 손글씨가 가득했다. "보고 싶다", "미안하구나", "잊지 않을게" 어느 것 하나 쉽게 지나칠 수 없어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그렇다고 태연히 눈에 담기도 어려워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아득히 늘어선 그 상실의 흔적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말줄임표로 끝나는 문장들이 유독 많았다. "XX야! 친구들과 행복하게 잘 지내렴...", "꼭 다시 태어나줘! 영원히 사랑해. 엄마 아빠가...", "바나나 초코파이 사 왔어. 얼른 먹어야지..." 점 세 개에 눌러 담았을 그리움, 공허함, 망설임 같은 게 떠올라 가슴에 얹혔다. 과연 그 마음을 어떻게 동여맬 수 있을까. 망자가 있다는 건 그가 멈춘 자리에서 누군가 삶을 이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토록 당연한 사실이 섬찟하게 다가왔는데, 그사이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소화하는 한편 자연스레 흩어진 서로를 충분히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서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합동분향소로 발끝을 돌렸다.


작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는 삼백 명에 달하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 교복을 입은 채였고, 그 얼굴이 참 앳되었다. 쨍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우리는 묵념했다. 명복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빌지 못해서. 망연히 다문 입술만 건조하게 부르텄다. 방문객들이 두고 간 선물은 영정 앞에 가지런히 쌓였다. 알록달록한 젤리부터 나이키 운동화까지. 저마다 주인이 있을 거라 짐작하며 나는 지난 삼 년을 되짚었다. 그 또래 아이들은 벌써 성인이 되었고, 참사 당시 스무 살이었던 우리도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무상한 날들 속에서 나이를 더하는 셈법이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봄이 오면 찾아오는 통증을 마치 새 달력처럼 넘겨 왔다.


한쪽 벽면에는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세월호 가족 식당에서 차 한 잔 마시고 가세요.' 그길로 문을 두드리자 실내는 밥을 짓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故 허다윤 씨의 어머니 박은미 씨와 마주 앉았다. 그는 지난주에도 학생들이 다녀갔다며 노련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선체 인양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는 여전히 이곳을 지키는 미수습자 가족들의 사정을 알렸다. 가라앉은 배에 자녀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고, 주검이 없으니 장례를 치르지조차 못했다고. 오죽하면 유가족이 되는 게 꿈이라는 그의 말이 몹시 외롭게 들렸다. 분명 손님을 맞을 때마다 똑같이 전했겠지. 어쩐지 덤덤한 그를 보며 나는 울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로 되돌아갔다. "안녕히 계세요." 그런 인사를 마지막으로 내가 만난 전부를 팽목에 남겨 두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버스에서는 금세 피로가 쏟아졌다. 한 숨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게 그저 꿈만 같았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다. 故 허다윤 씨 또한 마침내 박은미 씨의 품에 안겼다. 마찬가지로 다 잊어버린 듯 살다가도 오랜 소식이 한 번씩 '목엣가시'처럼 깊게 걸렸다. 어쩌면 그날 이후의 일상이란 꼭 그런 식으로 계속되었다. 항상은 아니더라도 가끔 사람들의 근황과 안부를 묻고 싶었다. 다들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이야기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끊임없이 갱신되어 역사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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