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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잠 Jun 23. 2023

봄날의 그림자

홍매화의 분홍빛 분가루


봄날의 그림자


단양의 작은 마을 끝에 선배의 별장이 있었다. 소박한 그 집 뒤꼍엔 목련, 벛나무 등 여러 나무와 함께 오래된 홍매화 한 그루가 있었다. 습자지처럼 얇은 겹꽃잎들이 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도 함께 파르르 떨렸다. 그 나무를 처음 봤을 때

 “찐분홍이다. 색이 이렇게 섹시해도 되는 거야? 분홍색이 이런 느낌이었나?”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유난히 짙은 분홍색이 얼마나 유혹적이던지 곧바로 사랑에 빠졌고,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단양 집에 다녀온 선배가 말했다.

“지난 여름 강풍에 뒤꼍의 홍매화가 쓰러졌어. 굵은 가지가 생으로 부러졌는데 보는 게 너무 아프더라. 뿌리 박고 있는 나무라도 살리겠다며 부러진 가지를 톱으로 자르는데, 그때 신기한 걸 봤어. 잘려지는 가지에서 분 같은 분홍빛 가루가 날리는 거야. 얼마나 고운 가루가 날리던지. 지금 생각해도 환시였나 싶어.”

이야기를 듣는 나는 햇빛 받으며 날리는 분홍 분가루를 상상했다. 아찔하지만 몽환적인 모습이었다. 


선배는 그해 가을과 겨울을 서울에서 보내고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비워뒀던 집 정리를 하러 간다고 했다. 사람 모아 가서 놀다 오자는 말에 여럿이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 놀자는 말에도 솔깃했지만, 남겨진 나무는 잘 살아 있는지 홍매화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날 단양으로 가는 길은 안개가 자욱했다. 자동차 라이트에 비춰 흩어지는 안개가 분홍색 분가루처럼 날아다녔다.


선배가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주차를 하는 사이에 차에서 뛰어 내렸다.  차문을 닫지도 않고 뒤꼍으로 달려갔다. 나무를 보는 순간 내 의지와 관계없이 두 다리가 덜덜 떨렸고, 머릿카락들이 쭈뼛 섰으며, 깨알같은 소름이 귀 옆을 지나 어깨로 팔로 발가락 끝까지 퍼지며 온몸을 지배했다. 내가 놀란 것은 수십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는 윗 부분이 부러져 고꾸라진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뿌리박고 있는 커다란 나무와 꺽인 가지마다 회색과 흰색의 작은 버섯들이 가득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뿌리 박고 있는 남은 가지라도 살리려고 애썼던 선배의 마음을 외면한 채 홍매화는 죽어가고 있었다. 


홍매화는 검버섯 같은 곰팡이를 온 가지에 키우면서 그래도 봄이 왔다고 꽃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모든 삶이 죽음을 전제로 한 여정이라는 것을 홍매화가 눈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생명이란것이, 삶이란 것이 이토록 질기고 미련한 것이었던가?’ 처절하도록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은 바늘로 후벼파듯 아렸고, 몸에는 한기가 서렸다. 

‘그런데 부러져 뿌리에서 잘린 가지들은 그렇다 치고 뿌리박은 너는 왜? 너는 살았어야지. 버텼어야지.’ 혼자 생각하며 한참을 바라보았다.

‘하긴, 생으로 팔다리 부러졌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어쩜 잘려나간 가지에 곰팡이가 먼저 피었을지 모르겠네. 옆에서 보는 지도 버티기 힘들었겠지.’


거실에 모여 있는 일행에게 홍매화에 버섯이 피었다고 이야기했다. 그중 나무공예를 하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내 말을 듣자마자 엉덩이를 툴툴 털며 일어나 뒤꼍으로 가셨다. 잠시 후 뒤따라 나가니 이리저리 가지를 들춰 보고 계셨다.

“손가락 굵기의 가지는 잘 말려 조각하고, 목걸이 만들어도 좋겠고, 좀 더 굵은 것은 양초 받침을 만들면 되겠어.”

선생님은 어느새 톱을 찾아와 나무를 자르기 시작하셨다. 차마 가까이 서 있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톱질하는 손놀림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으로 눈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공포 영화를 보는 사람들처럼 눈에선 눈물이 흘렀지만 생각은 온통 분홍색 분가루로 가득했다. 

“울지마. 뭐 그리 서럽게 우냐. 내가 얘들로 예쁜 거 만들어 줄게.”

무심히 툭 던지시는 선생님의 목소리에도 슬픔이 함께 쏟아져 나왔다.  


앞 뒤로 반복되는 톱질에 황매화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둥글납작하게 잘려진 나무 토막들이 하나둘씩 옆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때, 내 눈에 보인 것은 분홍빛 분가루가 아니었다. 납작한 단면의 속살에서는 선홍빛 물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분홍색 물이다. 분홍색 눈물이다.’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꺾이고 동강 난 몸으로 여름과 가을, 엄동설한 겨울까지 버텨 낸 생명이다. 봄이 되면서 수분을 빨아들이고 어쨌든 봄이 왔으니 나는 꽃을 피우겠다는 마음이었을 게다. 곰팡이도 제 몸의 일부인 양 꽃보다 더  많이 피워 낸 홍매화. 울컥하지 않으며 천천히 배어 나오는 홍매화의 붉은 눈물은 삶의 마지막을 차분하고 평온하게 맞이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홍매화의 마자막 모습이 잊히지 않았으나 여러 해가 지나면서 아렸던 기억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곧 홍매화의 계절이 온다. 아직도 쨍한 봄햇살을 마주하는 홍매화를 보면 처음 상상했던 아찔한 몽환이 소환되지만, 선배가 이야기했던 분홍빛의 분가루를 볼 기회는 없었다.

아, 볼 기회가 생기면 안 되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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