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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잠 Sep 15. 2023

쉼표

차와 만나는 시간

차를 준비한다. 뽀얀 전기포트에 물을 가득 넣고 버튼을 누른다. 거실 창밖의 먼 거리를 멍하니 바라본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 보이던 산이 몇 년 사이 세워진 아파트에 가려져 사라져버렸다. 내 눈은 숨은 그림 찾듯 산 끄트머리를 찾고, 그사이 뽀글거리며 물이 끓기 시작한다.


차를 내린다. 쉬는 시간이다.

“집에 있을 때 뭐해요?”

“특별한 일 없으면 책 보고, 밥 먹고, 운동하고. 그리고 차 마셔. 차 마시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야.”

“가만히 있지를 않네. 차 마시는 것도 뭔가를 하는 거잖아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몇 시간 있어 봐요.”

낮에 다녀간 후배는 멍때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꽤 자주 필요하다며  잔소리했다.


500원짜리 동전 정도의 크기 차 한 조각을 집게로 집어 지도의 모양이 새겨진 납작한 모양의 자사호에 넣는다. 세차를 한 번 하고 다시 물을 붓고 잠시 기다린다. 차가 우려 나올 시간에 눈 뜨고 멀뚱히 쳐다보는 다우 한 번 씻겨 준 다음 숙우에 차를 걸러낸다. 투명한 갈색이 거름망을 통해 걸러지는 동안 묵직한 향이 코를 찌른다. 매번 흙향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초콜릿 향 같기도 하고 견과류 향 같기도 하다. 알고 있는 어떤 단어나 표현을 찾을 수 없는 오묘함이 있다. 차에는 휴식의 향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는 절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총무 소임을 보시던 스님을 통해 맛을 보고 알아가기 시작했다. 매일 다른 차를 마시면서 이론은 없어도 좋은 차에 길든 입맛만 살았다. 오늘은 맛이 어떨까. 호기심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같은 차라도 매일 맛과 향이 다르다. 차의 양이나 온도도 이유겠지만 기분도 한몫 단단히 한다.


차를 잔에 따르고 마신다. 천천히 입술로 가져오면 콧속으로 향이 먼저 들어온다. 그 다음 입안에서 맛이 느껴진다. 손끝 지문을 타고 시작된 온기가 피부결을 따라 천천히 때론 빠르게 온 몸으로 퍼진다. 뜨거움보다 어리고 미지근함보다는 성숙함이 입 속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차에는 편안함이 있다.


저녁에도 차 마시는 것을 꺼리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예외다. 잠 안 오지 않느냐, 화장실 자주 가고 싶지 않으냐, 속 아프지 않냐 물어보는데 내 경우엔 커피보다 잠의 질에 영향을 덜 받는 것 같다. 저녁엔 생차보다 숙차를 마시고, 혼자 마시는 차의 양은 많지 않아 문제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차 안주로 술을 마시면 신기하게 취하지 않던 때가 있었는데 젊음이었는지 차의 효능이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의 체력으로는 차 안주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휴식이었던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만큼 잘 쉬는 것도 중요하다는데 언제부터 쉬는 일이 힘들어진 걸까. 무엇에 쫓기는 걸까. 질문하고 생각한다.


초의선사의 동다송에는 차는 혼자 마실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 뜻은 차를 마시며 수행하라는 것이지 혼자서 차 마시는 즐거움에 빠지라는 뜻이 아니라고 했다. 난 혼자서 마시는 즐거움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니 마음공부는 틀렸나 싶다. 씻고 닦은 것들을 다탁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다시 창밖을 본다. 밖은 어두워졌으나 마음은 차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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