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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잠 Jun 01. 2024

시를 기억하는 일

색색의 볼펜으로 예쁜 그림을 그리고 좋아하는 시를 적었다. 그 종이를 벽에 붙여 놓고 아침에도 밤에도 읽었다. 여중생 다락 방은 알록달록한 글씨와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그 벽에는 시어가 넘실거렸다. 시 중에 신경림 시인의 시도 있었다.


며칠 전 신경림 시인의 부고 기사를 읽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면 기사를 읽는 모든 순간에 가슴에선 갈대가 울고 있었다.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그 시절에 내가 읽었던 시들은 여전히 뼛속에 숨어 있다가 누군가 툭 건드리면 삐걱거리며 튀어나온다. 입 밖으로 술술 나오는 시가 신기하기도 하다. '이 시가 아직 외워지는구나.' 지금은 다 외우지 못하고 한 문장만 기억하는 시가 대부분이다. 문장들은 고립의 순간에 나를 밖으로 끄집어내고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토닥이며 스쳐 간다.


림태주 시인은 ‘그리움의 문장들' 에세이에 ’네가 시를 품고 있다면 네 몸 안에 푸른 행성 하나가 들어 있는 거지. 그 행성이 하나의 물방울일 수도 있고, 한 줄의 시일 수도 있고'라는 문장을 썼다. 내 몸에 푸른 행성 하나가 들어 있다고 믿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시점부터 책방에서 시집을 사는 일은 드물었다. 마지막 시집이 엘제 라스커 쉴러'의 시집이었다. 외우지도 않았고 옮겨 적지도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은 계속 추가되지만 목록에 시집은 없었다. 시를 온전히 담기에는 내 가슴이 너무 작아졌다.

 

김선영 작가는 여행지 동네서점에서 시집을 한 권씩 구입한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농밀한 독서가 된다고 한다. 여행 가방에 챙기던 긴 글의 책을 정작 읽지도 못하고 들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는데 왜 시집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좋은 방법 한 가지를 배웠다. 


시 한 구절 기억하는 일로 마음 안에 '푸른 행성' 하나가 들어 있었다고 믿으며 우주 밖으로 달아나기 전에 움켜쥐고 싶은 마음이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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