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가는 아쉬움을 달래며 이곳을 찾은 것은 더 이상 달력에 넘길 꺼풀이 한 장도 남지 않은 지난해의 마지막 달이었으니, 나는 불과 3개월만에 이곳을 다시 찾게 되었다. 겨울이 한껏 진지해지는 와중에도 가끔은 외투를 벗어던져도 괜찮았던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 동네의 볕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이렇게 빨리 지키게 될 줄이야. '라멘 코킨타'라는 간판을 내걸고는 있지만 라면 빼고 모두 잘하는 이곳의 돼지고기 연골찜이 무척 그리웠고
가고시마를 요약하는 몇 가지의 단어를 추려내는건 전혀 어렵지 않다. 화산, 흑돼지, 소주. 하지만 그중에 으뜸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주저않고 돼지를 택할 것이다. 역시나 먹어서 남는 것이 제일.
지난해 처음 찾았던 가고시마, 나는 환영식을 '타케테이'라는 이름의 돈까스집에서 치렀다. 정말이지 성공적이다 못해 감동적인 만남이었는데 나는 그 환희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회하지는 못했다. 물론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 동네에 돼지로 음식을 만드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닌데 그저 일편단심이기에는 나의 혓바닥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곳이 시내에서 너무 멀다는 것이다.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택시의 도움을 빌리던가 두 다리에 의지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마땅찮은데, 그 무엇 하나 녹록지 않다. 새로운 집을 발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유로 찾은 이곳은 이름만큼이나 정직하게 흑돼지로 만든 돈까스를 취급하는 '쿠로카츠테이' 되시겠다.
한국어로 된 메뉴판도 갖추고 있다. 고객을 배려하는 마음이 참 갸륵하다. 그뿐인가. 살짝 사악한 가격에 망설이는 이들을 위해 점심 한정 세트도 갖추고 있다.
이것 없이는 가고시마의 식당이라고 할 수 없다. 지역 특산 소주가 진열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술을 부른다. 하지만 아직은 갈길이 먼 이른 아침이었기에 축제는 잠시 미루기로 한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흑돼지와 흑우의 산지다. 그 재료로 만든 음식의 맛을 논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저 상기하고픈 사실은 이 녀석이 내 엄지손가락보다 두껍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씹는 족족 살포시 무너져 목을 타고 넘어가기 바빴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찾은 타케테이와 비교하면 양이 조금 적은 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한 끼 식사로 부족할 만큼은 아니다. 혹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어떤가. 하나 더 시킨다고 한들 점심에는 2만원을 넘기가 쉽지 않으니 고민하지 말자.
그래도 고민이 된다면 장국에 의지하는 것도 방법이다. 양이 적은지 적당한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애매한 지점에서 균형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중이라면 밥 한 그릇을 친구 삼아 장국을 들이키자.정말로 치명적인 매력을 가졌다.
우리나라에서 굳이 비슷한 음식을 찾자고 하면 소고기뭇국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적당한 간과 익숙한 맛에 더해 들어간 재료마저 푸짐하니, 이것만 있어도 밥 한두 공기는 거뜬하다.
가장 비싼 상로스카츠 정식을 주문했다. 가격은 단돈 1,200엔. 점심에는 모든 게 저렴해서 큰 고민 없이도 시도할 만하다. 그뿐인가. 이것 말고도 장점이 아주 많다.
우선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열두시를 막 지난 시간이라서 대기열의 공포에 사로잡힌 채로 이곳을 찾았지만 전혀 기다리지 않았다.
절묘한 위치도 장점이다. 덴몬칸도리와 아사히도리에서도 별로 멀지 않다. 혼자서 찾아가려면 밥값보다 택시비가 더 나올지도 모르는 타케테이와 비교했을 때 이곳은 마음의 준비 없이도 찾을 만하다.
아무리 한국 사람이래도 쌀밥만 먹고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로는 국수도 먹어야하고 빵도 가끔은 뜯어줘야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빠질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소주. 지난 가고시마 여행에서는 '밝은 농촌'이라는 이름의 소주 양조장을 찾았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양조장을 찾은 이유다.
가고시마추오역에서 열차로 20분가량을 달리면 만날 수 있는 조그마한 간이역 '고이노'. 이곳에는 150종류가 넘는 소주를 만날 수 있는, 문자 그대로 애주가들의, 애주가들에 의한, 애주가들을 위한 양조장 '사츠마 무쌍'이 있다.
1966년 협동조합의 형태로 출발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하니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아마도 가고시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소주양조장 중 하나일 것이다. 일하는 동안 전국의 애주가들을 후렸을, 나름화려한 과거를 간직한 채 주차장 한켠에서 평온한 노후를 즐기고 있는 저장고의 크기만으로도 얼마나 거대한 양조장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최소 75만 병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60만명 남짓한 가고시마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술자리를 즐겨도 될 만큼이다. 이 저장고에 담긴 술을 한 번 내어놓으면 충분하다. 심지어 75만 병은 750ml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우리에게 익숙한 소주병으로는 쌓으면 얼마나 엄청날지 감히 짐작조차 쉽지 않다.
'대체 얼마나 가열차게 술을 빚길래'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창고또한 발군이다.
그런가하면 이렇게 고즈넉한 자태로넋을 빼놓기도 한다. 공간의 면면에서 느껴지는 연륜이 과연한두 번 주당들을 홀린 솜씨가 아니다. 향긋하게 익어가는 누룩의 향취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끌린다.
'이제부터 이 술은 모두 제껍니다'
'이곳에 있는 술도 이제부터 모두 제껍니다'
아마도 전부 시음하고자 마음먹었다면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쉴 새 없이 끓어오르는 욕구를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억눌렀음에도 불구하고 서른 잔이 넘는 소주를 들이켰다. 아무리 한 잔의 양이 적었다고 한들 소주 한 병 가까이는 족히 마셨을 것이니, 한바탕 대낮부터 벌어진 잔치는 조여진 정신줄을 조금씩 느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난번에 찾았던 '밝은 농촌'보다는못하다고 느꼈지만 이 녀석만큼은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벚꽃을 입술에 물고 그 사이로 잘 만들어진 소주를 한 모금 흘려보내면 이런 맛이 날까 싶다. 비록 가고시마의 벚꽃은 바닷바람에 씻겨 어딘가로 흩어진 지 오래지만, 이 녀석에게는 아직도 봄의 향취가 가득하다. 정말로 지갑을 열고 싶었지만 절대로 수하물을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이 지름신을 가로막고 말았는데, 그렇게나 미련한 결정이 어딨었나 싶다.
나는 이게 참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는 한 상 가볍게 차려서 곁들이기 좋은 크기로 병입 한 소주를 만나볼 수 있다. 수하물로 실어오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고구마 소주의 특별함을 진득하게 경험하고 싶다면 이 녀석 한 병으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기는 애주가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헤아릴 줄 아는 곳이다. 시음만 하면 아쉬울까봐 씹을거리도 넉넉하게 구비해놓았다. 오징어 채인지 생선을 얇게 포로 뜬 것인지 정체는 알 수 없는 것을 두 장겹쳐 사이에 깨를 촘촘하게 박아놓았다. 와사비 맛이 나는 오징어가 이곳에서 가장 인기있는 안주거리라고 하였지만 나에게는 이것만큼 맛있는 것이 없었다. 그 어떤 고민 없이 지갑을 열게 된 것은 당연지사.
한 병에 400만원이라는데 아쉽게도 이 녀석은 시음이 되지 않았다. 이럴때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어야지 다짐한다. 언젠가 이 녀석을 당당하게 계산대로 가져갈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말이다.
지난번 찾은 '밝은 농촌'에서는 3년동안 숙성한 고구마 소주인 이 녀석과 귀국길에 동행하였는데, 아쉽게 이번에는 그 어떤 녀석과도 동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괜찮다. 멀지 않고, 그리 비싸지 않은 동네인 덕분에 너무나 그리우면 다시 또 찾으면 된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딸꾹) 보내고 갑니(딸꾹)다.
잔치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날의 저녁이 소주와 함께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훌륭한 하루의 마무리였다.
한국에서 경험하기 힘든 풍경을 원한다면,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게 영 귀찮다면, 가고시마로 오시라. 시도 때도 없이 뿜어대는 화산은 당신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하고, 이곳의 고기는 뭘 먹어도 맛있으니 말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가고시마.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