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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Jul 22. 2017

여행을 가다. 두번째 제주도, 첫번째

제주도 '17.07.14(금) ~ '17.07.17(월)


서늘하다못해 서슬이 퍼랬던 2월의 제주도는 물러간지 한참이다. 제주의 겨울바다는 내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더라도 딱히 생각나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잔뜩 껴입고 간다고 한들 뚜벅이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겨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 여름의 제주도를 겪어보기로 하였다. 극점의 가운데에는 봄과 가을이라는 좋은 변곡점이 있지만, 그저 팔자려니 제주도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 여름의 제주도가 얼마나 가혹한지는 십 년 전에 이미 겪었다. 신명나게 말아드신 대학교에서의 첫학기를 뒤로하고 맞이한 첫 방학. '신입생의 패기는 이래야지' 하는 마음으로 10년 전 이맘 때 찾은 제주도였다. 그때라고 딱히 한낮의 볕이 겸손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자전거를 타고 구석구석 잘도 찾아다녔다. 지금은 그렇게 할 자신이 없고 생각도 없었던 바, 렌트를 하기로 했.. 으면 좋으련만 괜히 차를 빌렸다가 수리비만 잔뜩 적립할 것 같아서 대중교통의 힘을 빌기로 했다.



나의 여행이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갑작스레 결정된 제주행, 그 시간이 밤 열한시, 다음날의 나는 제주도 땅을 밟고 있어야 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표가 있을리 만무하다. 아침 여섯시 언저리에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겨우 끊고는 부랴부랴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물기 가득 머금은 밤공기를 뚫고 내려앉는 달빛 세례를 즐길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수속하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는데, 그새 날이 밝았다.


제주-김포 노선은 단일노선 기준 전세계에서 연간 수송량이 가장 많은 구간답게 뜨고 내리는 비행기의 종류와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물론 '그렇구나'하고 넘어가면 끝인 것인데, 이번에 제주도로 건너가면서 그 위엄을 제대로 체감하였다. 아침 여섯시에 뜨는 노선에 250석 가까이 되는 B767을 투입한 것에서 이미 한 번 놀랐는데, 그 비행기에 빈자리가 거의 없는 것을 보면서 두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숨도 못자고 도착한 김포공항이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지금까지 비행기에서 한번도 잠에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의자에 앉자마자 절로 눈이 감기었다. 분명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중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비행기는 바다가 보이는 활주로 위를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몸뚱아리가 한계에 가까워옴을 알려왔다. 시원한 곳에서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올라탄 버스. 쾌적한 수면환경을 보장하는 것은 좋았는데 하필 서귀포로 직행하는 리무진버스다. 바로 옆 애월까지 가는데 한시간이 걸리는데 서귀포까지 가는데 한시간밖에 걸리지 않는것은 대체 무슨 조화인지. 여전히 잠에 취한채로 목적없는 여정을 시작하였다.


'Legendary Math' 혹은 "Legend of Math'가 조금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었으나 미친듯이 내리쬐는 볕에 거의 완벽에 가깝게 사고회로가 정지하였다. 제주도의 볕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덥다'라는 표현보다 '아프다'라는 말이 조금 더 적절할 것 같은 인적조차 드문 거리를 걸으며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 '살려주세요'.


잠시 카페에 들러 한숨 돌리기로 한다. 반쯤 정신이 나가버려서 사진을 찍을 생각도 못했다. 간밤에 쌓아둔 일이 발목을 붙잡아 쉴틈 없이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던 탓도 있지만.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조금씩 또렷해지는 정신줄을 제자리로 가져다놓고 보니 어디에 갈지도 정하지 않았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조금 새로운 곳을 가보고 싶었는데 대중교통으로는 마땅찮다. 그런점에서 제주는 나처럼 걷기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여러모로 아쉬운 동네이다. '올레길'이나 '오름'과 같이 걷기 좋은 곳이 많은 동네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좋은지 어떤지는 직접 가서 걸어봐야지 알텐데, 가는게 일이다. 아주 큰 일. 조만간 교통체계를 개편한다고 하는데,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면 뚜벅이 신세를 벗어나기 전까지 제주도를 찾는 것은 꽤나 꺼려질 것 같다.



여튼, 어디론가 향하는 버스를 잡아탔다. 한결같이 친절하지 않은 버스기사가 여전히 신경쓰이지만 너무 피곤하므로 굳이 반응하지 않기로 한다. 겨우 의자로 걸어가 몸을 얹은 채로 한시간이 조금 안되는 시간을 달렸다. 도착한 곳은 한라산 동쪽 어귀에 자리하고 있는 '사려니숲'. 꼭 와보고 싶었는데 지난번 여행에서 오지 못했던 것이 내심 아쉬웠던지라 가장 먼저 찾게 되었다.



아마 회식보다 제주도 여행 횟수가 더 잦았을지도 모르는, 회사 다닐적 같은 파트에 있었지만 지금은 양구에서 농부의 삶에 귀의해 사과농사를 짓고있는 대리 형의 말에 의하면 사려니숲길은 안개가 짙고 적당히 흐린날에 찾는 것이 아주 좋다고 하였다. 그 말을 뇌까리며 초입에 들어서니, 안개가 자욱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흐린 하늘이 나름의 분위기를 더한다. 어떤 모습이 펼쳐질까,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다.



'신성한, 신령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제주도 방언 '사려니', '전국 이름값 대회'가 있다면 당당히 순위권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절로 걸음을 느려지게 한다. 울창하게 솟아오른 침엽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빛의 덩어리가 나즈막히 자란 활엽관목과 만나 빚어내는 색의 조화와, 쉴새없이 뿜어져 나오풀향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힘이 다. 피곤한 와중에 불친절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나빠진 기분이 자연스레 풀리는 듯 하였다.



가방 만드는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여행하는 동안 일과 일상의 경계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여행용 가방을 만드는 입장에서 여행지에 가서 찍은 가방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무거운 장비를 챙겨서는 틈만 나면 뷰파인더 속에 가방을 욱여넣고는 한다. 쉬고 싶어서 여행을 떠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기는 하지만, 체계가 잡히고 함께 일하는 분들을 모셔오기 전까지는 마땅한 도리가 없다. 계속 찍어대는 수 밖에.



그래도 마음에 드는 사진을 만나게 되면 그만큼 보람있는 일이 없다. 또 그렇게 해야지 밥값 한 것 같은 기분에 마음 놓고 그 장소를 떠날 수 있기도 하고.



마음같아서는 시간이 허락하는 동안은 이 숲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몸에 잔뜩 둘러멘 가방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텐데, 저절로 낮아지는 어깨의 높이와 점점 커지는 뱃속의 소리가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하늘이 산마루를 때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기약없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멍하니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 속에 담아본다.



시내로 돌아오니 오후 네시가 넘어있다. 그제서야 뱃속에 첫 끼니를 밀어넣는다. 삼성혈 근처에 있는 '만세국수'라는 이름의 고기국수집이었는데 무엇보다 5,500원의 바람직한 가격이 나를 기쁘게 하였다.



맛을 알아보는 재주가 크게 없는 덕분에 웬만한 음식은 다 맛있다. 이곳의 음식 역시 맛있다. 7천원짜리 고기국수나 6천원 조금 안되는 가격의 고기국수나 똑같이 맛있다. 걸걸한 막걸리 한 잔이 목구멍을 적시고 나니 이만한 것이 없다. 앞으로 고기국수는 이곳에서만 먹어야 할 것 같다.


식당 문을 나서는 시간이 여전히 이르다. 해가 떨어지기는 커녕 중천에서 내려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곳을 둘러볼 수 있는 많은 시간이 허락되었지만 이미 바닥을 뚫고 들어가버린 비루한 체력은 그것을 온몸으로 거부하였다. 어처구니없을만큼 뜨거운 제주의 여름은 무언가를 거추장스럽게 짊어진 채로 받아내기에는 녹록치 않았다.


더이상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얼음장만큼 차가운 물세례에 몸을 밀어넣고 싶을 뿐. 제주에서의 첫날이 저무는 순간이었다.





어디에서든 어김없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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