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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Nov 06. 2018

여행을 가다. 베트남 하이퐁, 두 번째

하이퐁, '18.10.15(월) ~ '18.10.17(수)



전날 한두 잔씩 홀짝거린 맥주의 여울이 생각보다 큰 파고로 들이쳤다. 새해를 맞이한 보신 종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고단한 아침을 시작한다.


누워서 빈둥거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그럴 수 없다. 오늘은 이 출장의 진 목표이자 사실상 전부인 사진 촬영이라는 대업을 수행해야 하는 날이고, 이를 돕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이역만리 하이퐁까지 걸음하는 고향 친구를 마중하러 공항을 가야 한다.



어수선하게 짐을 정리하고 호텔 카운터에 부탁해 택시를 부른다. 공항까지는 얼마 정도가 나올 것 같으냐고 서투른 베트남어물어보니 대략 10만 동 정도가 나온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혼자 택시를 타본 경험이 많이 없어서 이곳의 택시비는 감이 잘 서지 않았지만 몇 번 경험해 본 결과, 내가 생각한 비용의 절반 언저리에서 모든 택시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10만 동이 나온다고 이야기하더니 정말로 10만 동이 나왔다. 공항의 아침은 고요하다. 하이퐁을 오고 가는 비행기는 하루를 온전히 따지면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지만 아침만큼은 예외다.



공항 문을 벗어나자마자 마주하는 노상 식당에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망중한을 즐긴다. 고향 친구가 오기까지는 아직 한 시간가량이 남아 에 오늘 하루 펼쳐질 일들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서 한가로시간을 보.


친구도 인정한 사실인데 공항이라는 편견을 입고도 이곳의 커피와 음식은 꽤 맛있는 편이다. 내가 마셔 본 베트남 커피 중 가장 맛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뭘 시켜 스스로를 책망할 일은 생기지 않으니, 최소한 괜찮은 집의 미덕 갖추고 있는 공항 식당이다.



전날에는 뜨거운 공기가 잡아먹을 듯이 덮치더니 다행히 그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입국하자마자 입에 무언가를 넣을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친구의 명을 받들기 위해 비행 추적 사이트의 힘을 빌려 친구가 베트남 땅을 밟기 직전에 쌀국수 한 릇을 시켜 았다. 본인의 일마저 바쁜 와중에 제대로 잠 한숨 청하지 못하고 베트남으로 날아온 친구는 다행히 그 쌀국수 한 그릇이 꽤나 입맛에 맞았던 듯하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바쁜 일정을 위해 길을 나다.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았다. 찍어야 할 사진은 차고 넘치 마음은 급하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다. 공항에서 볼일을 마치기가 무섭게 찾은 곳은 그토록 벼르고 벼르던 기차가 지나는 마을이다. 마침내 원하는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다. 아니, 찍어야만 했다.



아무리 가방이 중하다지만 바쁜 시간 쪼개어 먼 길 발걸음한 친구다. 어찌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되도록 많이 남기고 싶었던 친구를 위해서도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다. 렌즈를 바꿨더니 사진이 꽤나 만족스럽다. 무려 1년 넘게 번들렌즈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비로소 쩜팔이를 식구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세계로 통하는 문은 단 10만 원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자유로운 닭들의 안식처에는 강아지도 함께한다. 덕분에 자칫 심심할 수 있는 구도가 조금 더 다채로워졌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딨는가 싶다. 나와 친구 둘 다 개를 무서워한다는 사실만 제외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찍어야 했기에 인고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친구와 나 모두에게 힘든 시간일 수밖에 없었는데, 심지어 그 강아지는 호기심이 지나치게 왕성했던지라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하지않았다.



나는 정말이지 이번 출장을 계기로 베트남의 골목을 사랑하게 되었다. 약간만 만져도 바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사진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물론 훌륭한 배경만큼이나 가방이 잘 어울리는 친구의 지분도 무시할 수 없다. 어떤 말로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정말이지 친구에게는 입이 마르고 닳도록 감사의 뜻을 전해도 부족할 것 같다. 물론 지금도 틈만 나면 감사의 뜻을 전달하고 있기는 하다만 말이다.


온갖 가방을 들쳐 메고 하루종일 두 다리에 의지해 이곳저곳을 헤매야 하는 강행군이 결코 녹록않았을 텐데 너무나 고맙게도 친구는 힘든 내색 않고 하루를 즐겨주었다.



친구의 제안 덕분에 이런 사진도 찍을 수 있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아마 나의 눈썰미와 기계를 다루는 솜씨가 조금 더 미려했다면 훨씬 쓸만한 것들을 많이 건져냈을 것인데 부족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닥친 한계는 조금 통탄스럽다.



아침부터 쉬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더니 당이 고갈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시 재충전의 시간 가질 겸 오페라 하우스 옆 하이랜드 커피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하노이에는 차고 넘치는데 하이퐁에서는 하이랜드 커피를 찾기도 쉽지가 않다. 이곳의 커피는 한 모금 삼키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달고 맛이 진하다. 그래서 어른이 입맛인 나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한다. 하지만 하이퐁에서는 이 커피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 사실이 그저 아쉽다.



지친 심신을 달랜 후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는 전자기기를 수리하는 노점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데, 뜬금없이 내 유년기를 함께했던 공학 계산기와 같은 기종을 만났다. 지금도 고향집 어딘가에 곤히 잠들어 있 그 녀석을 이곳에서 만나는 감회는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분신처럼 함께공학계산기였다. 하지만 모두 지나간 일이다. 간단한 문제는 암산이 될 정도로 미분방정식일상이었던 과거는 정말이지 흘러간 과거가 되었고, 지금의 나는 이렇게 가방을 만들고 있다.



내가 가진 하이퐁 오페라 하우스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하다. 생산 벤더 직원 분과 함께했던 첫 베트남 출장에서 이 건물 앞을 지난 적이 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여행객을 사냥하는 호객꾼들의 너무나도 끈질긴 접근에 학을 뗀 경험이 있다. 다행히 이날은 그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오랜 시간 건물의 아름다움에 눈길을 줄 수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 앞에는 꽃을 파는 상인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여유가 없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행의 묘미는 언제나 세렌디피티에 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우연한 발견, 그 의외성이 주는 기쁨은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오기 때문에 훨씬 극적이고 솔직담백하다.


오늘 묵을 숙소가 있는 깟바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중 우연찮게 눈길이 닿은 이 골목이 우리에게 그러했다. 빛바랜 파라솔 너머로, 허름하지만 잘 정돈된 풍경이 주는 매력은 배가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나와 친구의 발목을 한참이나 붙잡아 두었다.



좋은 빛과, 좋은 날씨, 좋은 풍경이 주는 매력을 사진으로 온전히 담아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기억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누군가의 쉬간 흔적을 벗 삼아 나와 친구는 거울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빛의 조각을 담아내었다.



이 길의 끝에는 깟바로 가는 선착장이 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진을 담아낸 덕분에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처음 뵙겠습니다. 벤빈 선착장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깟바섬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겉보기에도 어설프더니 내실도 허술하기 그지없다. 당장 구글에서 '벤빈 선착장'을 검색해 봐도 그리 좋은 평을 하는 사람이 없다. 선착장에서 깟바로 가는 방법에 대해 정제된 정보를 찾기도 쉽지가 않다. 찾은 글마다 뱃삯이 다르고 시간표를 찾는 건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부정확한 정보가 전화위복이 되었다. 표 한 장에 22만 동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왔는데 우리는 그보다 4만 동이나 적게 주고 표를 구했다. 한국 돈으로도 2천 원이나 싸게 주고 산 것이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다. 혼자 여행할 때라면 한 끼 밥값을 번 것이나 다름없다.



의자가 열 개 가까이 놓인 창구가 길게 늘어섰지만 정작 창구에는 한 명의 직원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어딘지 모르게 암표상처럼 보이는 사람 한 명이 창구 앞을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린다. 어딘지 모르게 의심스러운 이 사람의 정체는 당황스럽게도 매표소의 정식 직원이다. 창구 바로 앞에서 표를 들고 끊임없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믿어도 된다. 걱정하지 말고 그에게 표를 달라고 하자.



크지는 않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춘 쾌속선이다. 에어컨도 있고 구명장비도 갖추고 있으니 구색은 온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너무나 낡고 정돈되지 않은 내부의 풍경이 썩 미덥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겉만 보고 판단은 금물이다. 의자는 허름하고 실내에는 땀에 절은 냄새가 가득하지만 웬만한 기차만큼 빨리 달릴 줄 아는 녀석이다. 과장 조금 더 보태서 날개만 달면 하늘을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울 위를 부서질 듯이 달리는 요란함에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쉽지 않았지만 50km 가까운 거리를 45분 만에 주파했다. 과연 쾌속선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녀석이다.



깟바섬은 하이퐁에서 30km가량 떨어진 크지 않은 섬이다. 현지 사람들에게는 휴양지로 꽤나 유명한 곳인데 특이하게 서양 사람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 섬이다. 은은하게 섬 전체에 가라앉은 차분함은 홍콩의 펭차우섬을 떠올리게 한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푸근해졌다.



하루종일 육신을 쉬지 않고 몰아세운 탓에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하루종일 입에 넣은 것이라고는 커피 두 잔이 전부였던지라 끼니부터 해결하기로 다.



적당히 짐을 풀고 물로 찝찝한 기운만 걷어낸 다음 저녁을 먹기 위 발걸음을 옮겼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어둠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고, 짙어진 어스름의 존재감만큼이나 내 뱃속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섬이니 당연히 해산물 식당이 유명하다. 아무 데나 들어갈 수는 없었만 그렇다고 심혈을 기울여서 한 끼를 하겠다는 심산도 아니었기에 구글 지도의 성은을 적당히 입기로 했다. 나와 친구는 Bien Dong이라고 하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점의 식당으로 직행했다. 하루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발동한 탓일까, 쉼 없이 온갖 음식을 시켜댔다.



아무리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난히 맛있는 것이 있다. 이곳은 이 조개 볶음 하나만으로도 올 만한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넣고 볶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파에서 우러난 것 같은 단맛이 조개를 완벽하게 감싸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지 20일이 넘은 지금도 이 녀석의 맛은 생생하다. 그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하루종일 제대로 먹은 것이 없었던 판국에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엄두가 날  없다. 아무 말 없이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모조리 비워내고도 어딘지 모르게 모자람을 느낀 나와 친구는 쌀국수로 마지막 방점을 찍기로 했다.



잘 먹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식당에서 보낸 것이 아닌데 밤의 수문장은 생각보다 교대가 빠르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깟바섬의 밤거리, 힘든 하루를 내려놓고 여흥을 즐기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일거리를 잔뜩 가져온 친구와 애초에 일하러 온 입장인 나에게 안타깝게도 그런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잠시 야시장을 둘러볼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친구는 파인애플이 잔뜩 그려진 잠옷에 이상하리만치 집착을 하였는데, 결국은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아무리 일거리가 쌓여 있다고 한들 이역만리 타향을 매일 접하는 일터처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은 분위기의 바에 들러 커피와 칵테일을 시켜 놓고 하지 못한 일을 계속하였다.



자정이 채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밤은 완연히 내다. 시끌벅적할 이유가 없는 길거리는 완전한 적막 아래에 숨어들었고, 거리의 네온사인과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만이 등대처럼 조용한 불빛을 밝 뿐이다.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 아직도 하루의 마침표를 찍지 못한 나와 친구와 달리 너무나 고요한 깟바섬의 밤거리다.



한 개에 5만 동이나 줬으니 바가지를 썼다면 한참을 썼다. 순간 욱하는 감정이 괜한 시빗거리를 만들 뻔했지만 너무나 지친 나머지 그럴 의욕마저 들지 않았다. 아마 맛까지 없었다면 바로 달려 나갔을 것인데, 다행히 한 입 넣자마자 저절로 지어진 미소 덕분에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나 정신없이 일만 하다 잠을 청했던지라 언제까지 이렇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요하게 치열했던 하이퐁에서의 둘째 날, 그 밤이 그렇게 이별을 고하였다.





하이퐁에서도, 어김없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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