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혁 Dec 30. 2018

가고시마의 이모저모

가고시마, '18.12.20(목) ~ '18.12.22(토)


살을 찢을 것 같은 한기가 전신을 파고드는 하루이다. 두 겹을 덜 껴입었지만 잰걸음을 걷다보면 이따금 온기까지 느낄 수 있었던 일주일 전이 벌써부터 그립다. 정말 맛있는 음식과 생경한 눈요기가 함께했던 지난 가고시마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겨보려 한다.



지면과 점점 가까워지던 중 시야에 나타난 미나미다케산의 꼭대기에서는 쉴 새 없이 연기가 피어오른다. 화창한 날씨만을 기대해도 좋다던 기상청의 안내와는 다르게 하늘은 구름에 닫히었고, 이따금은 빗방울을 뿌리는 듯 하기도 하였다.



우거진 수풀을 낮게 날아 곧 활주로 위를 미끄러져간다. 예고없이 찾아온, 조금은 거친 신고식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했지만 나를 싣고 온 비행기는 무사히 가고시마와 조우하였다.



조그마한 동네의 아담한 공항이다. 조금은 심심한 듯도 하지만 꾸준히 오가는 이들이 있어 적적하지는 않다.



숙소에 짐을 풀기가 무섭게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전날 잠을 청한 공항 찜질방이 워낙 부산스러웠던 덕분에 모자란 잠을 충족하고 싶은 욕구가 하늘을 뚫는 듯 하였으나 그럴 시간이 없다.


인천을 날아올라 한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도 허락하지 않을만큼 짧은 거리에 위치한 이곳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세련된 구석이 있다.



한끼의 식사를 찾아가는 여정이 녹록지 않다. 이럴거면 중심가 근처에서 적당한 타협을 하는게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조금씩 밀려오는 듯 했지만, 왜 후회라는 이름이 붙었겠는가. 이미 늦었다.



흑흑.. 오늘의 점심은 맛있었다.


가고시마에서의 첫 끼니는 동네 주민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타케테이'라는 이름의 돈까스집이다. 가고시마는 흑돼지의 산지로 무척 유명한 곳이다. 화산 암반 지질로 말미암아 밭에서 나는 구황작물의 재배가 일찍부터 발달한 이곳 고구마를 먹여 키운 흑돼지로 명성이 높다. 돌이킬 수 있는 후회를 하였다면 아마 가던 길을 포기하고 다른 식당을 찾았을 것이니, 후회가 너무 늦었던 것에 그저 감사하였다.



가고시마는 흑돼지와 더불어 질 좋은 소주가 나는 고장으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다. 오랜 시간 대를 이어온 소주 양조장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는데, 그런 덕분에 어딜 가든 어렵지 않게 다양한 종류의 소주를 만나볼 수 있다.



고대하던 첫번째 끼니를 훌륭하게 해결한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지만 가고시마는 아직 패딩을 걸치기에도 살짝 이른 감이 있는 겨울의 문턱에 머물러있다.



더이상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감겨버린 눈꺼풀은 어스름이 하늘을 덮은 후에야 다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거리를 밝히는 장식들이 이곳에도 한 해의 마지막이 찾아왔음을 알게 한다.



혹시나 싶어 사쿠라지마섬이 보이는 항구를 찾았지만 맑은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다. 부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은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말이다.



어둠이 소복히 내려앉은 거리



흑흑.. 오늘의 저녁 역시 맛있었다...


재료가 워낙에 훌륭하다고 하니 만들어서 맛없는 요리가 무엇이 있을까 싶다만, 흑돼지 샤브샤브는 그런 중에서도 가고시마가 자랑해 마지 않는, 그리고 사랑해 마지 않는 녀석이다. 이 동네에서도 손에 꼽히게 잘하는 식당 중 하나인 '쿠마소테이'에서의 한 끼는 그 관심과 사랑의 이유를 단번에 깨닫게 해주었다. 말로 표현은 쉽지 않다. 음식은 먹으라고 만드는 것이니, 반드시 먹어보아야 한다.



기분 좋은 저녁이 저물고 다음날의 아침이 밝았다. 부디 개인 하늘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으면 바랐지만, 언제나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것이 현실의 삶이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소소한 발견은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는다. 비록 찌푸린 하늘은 여전했지만 이런 우연이 있음으로 하여 아쉬움의 무게는 조금이나마 덜어진다.



물론 기대를 거스르는 행위 역시 예고 따위는 수반하지 않는다.



트램의 시작과 끝이 교차하는 지점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소소하다만, 이곳은 1호선의 종점이다.



오늘의 목적지인 기리시마진구로 가는 길이 녹록지 않다. 시간대를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기차에 오른 덕분에 추가 요금을 지불하게 되었는데, 심지어 일하는 것 마저도 시원찮다. 기리시마진구를 한 정거장 앞에 두고 멈춰선 열차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않는다.



이렇게나 귀한 경험을 하게 되다니. 정전이란다. 가고시마에서 미야자키로 가는 모든 열차가 운행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대체 교통편을 이용해야하는 상황. 도무지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는 상황에 잠시 짜증이 일었지만 마땅히 계획한 것도 없는 하루였던 덕분에 이 흔치 않은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급한대로 전세버스를 대절하여 손님들을 실어나르려는 생각인 듯 하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역무원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지만 그 누구 하나 재촉하거나 불평 불만을 하는 이 없다.



말 그대로 산넘고 물건너 당도한 이곳은 기리시마진구역. 다시 가고픈 생각은 분명히 있는데, 엄두가 잘 나지는 않는다.



프랑스 파리에서 개업한 지 일 년 만에 미슐랭에 이름을 새긴 SOLA라는 식당이 있다. 아마 요리사가 꽤 재능이 있었나보다. 그리고 그 재능있는 요리사는 지금 가고시마산으로 향하는 어귀에서 자그마한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생소한 곳이 아닐까 싶은 기리시마진구 역을 굳이 찾아온 것은 그 빵집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는 기나긴 휴가를 떠나고 없다. 오늘부터.


되는 것이 없는 하루는 애당초 무언가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는 것이 좋다. 계획같은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그저 발 닿는대로 걸어보기로 한다.



얻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의 반대급부 역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빵을 향한 여정이었으니 다른 빵을 찾으면 될 일이다.



의도했다기보다는 이 빵집이 동네에 문을 연 유일한 식당이었다.



준비없이 당하는 매타작이 조금 더 아프듯이 우연을 가장하여 찾아온 행복은 조금 더 달콤하다. 간에 기별이나 보낼 요량으로 별 기대 없이 찾은 이곳은 손님을 참으로 따뜻하게 맞이할 줄 아는 곳이었다.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이곳을 채우고 있는 그 무엇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이곳의 사장님은 뛰어난 미적 감각 만큼이나 빵 솜씨 역시 꽤 훌륭하다. 적어도 좋은 재료를 아끼지 않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스스로가 가꾸고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 애정을 듬뿍 담을 줄 아는 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곳의 이름은 '오카라빵공방'. 휴가를 떠난 그 요리사를 만나기 위해 이곳을 반드시 다시 찾을 생각이 있으니 공방 역시 다시 만나게 될 일이 있을 것 같다. 그때까지도 부디 이 자리를 잘 지키고 있기를.



이곳의 소주가 유명한 것은 맛있는 소주를 빚어내는 양조장들이 많이 있음으로 하여 가능하다. 참 먼길을 찾아왔는데 제대로 된 소주 하나 경험하지 못하고 간다면 그것 만큼 아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 그리하여 찾게 되었다. '밝은 농촌'이라는 이름의 양조장이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이곳의 역사는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1911년부터 소주를 빚었다고 하니, 백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도 잘 빚은 소주가 있다. 박재서 명인의 안동소주는 가끔 즐기는 술이기도 하다. 허나 역사의 질곡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양조장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아직까지 살아남아 본인들의 특색을 지켜가는 양조장이 일본에는 많다는 것이 그래서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말할 나위가 없다. 음식은 먹어야 맛이고, 술은 마셔야 맛이다. 이곳의 소주는 정말 맛있다.



계획대로 된 것은 딱히 없었지만 충분했다. 규칙적으로 덜컹이는 소음을 벗삼아 시원하게 달리는 열차 밖으로는 뿜어내는 연기에 가려 하늘과의 경계가 희미해진 사쿠라지마의 모습이 펼쳐진다.



가고시마의 밤거리를 트램에서 맞이해본다. 홍콩처럼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매혹의 밤거리를 지나는 것 역시 아니다. 하지만 나름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일본 내에서도 다섯 군데밖에 남아있지 않은 노면전차인지라 그냥 지나치기는 아쉽다.



정류장에 내려 바라본 하늘에는 지평선 너머로 멀어지는 빛의 파도가 곧 내려앉을 어둠과의 짧은 조우를 시도중이다.



덴몬칸 공원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라멘 코킨타', 이곳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함께할 한끼가 기다리는 곳이다.



라면을 제외한 모든 것이 훌륭했다. 어차피 라면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돼지조림 코킨타' 혹은 '볶음밥 코킨타'가 조금 더 적절한 이름이 아닐까 싶은 이곳은 싸고, 맛있게, 많은 음식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고민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 소주 두 잔을 더했음에도 불구하고 삼만원이 나오지 않았으니 그저 훌륭하다. 여정을 마무리하는 한끼로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덴몬칸 거리는 어둠이 완전히 내릴 새가 없다. 공휴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성탄을 맞이하는 설레임은 이곳 사람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금요일이 불타는 것은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다. 불야성은 십세기 전 북송의 개봉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애타게 바라왔던가. 마침내 허락한 맑게 씻은 얼굴의 사쿠라지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흔치 않은 기회인지라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다. 사쿠라지마로 향하는 연락선에 몸을 실어본다.



거리가 거리니만큼 출발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잦아들 새도 마땅찮다. 맑은 하늘로 쉬지 않고 연기를 피워내는 사쿠라지마가 눈앞에 있다.



조금이라도 둘러보고 싶은데 도저히 여유가 나지 않는다. 이곳에 발 한 번 딛어보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싣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높이 솟은 산 중턱에 걸린 것이 과연 구름인지, 연기인지 경계가 모호하다만 그 양이 조금 더 많아진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런 경험을 살면서 얼마나 해볼 수 있을까 싶은데,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저 일상인 듯 했다. 온갖 호들갑에 벌어진 입이 쉴 틈이 없었던 나였지만, 길을 걷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에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빈 틈 없이 꽉 채워낸 오전을 뒤로하고 가고시마와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 버스는 곧 나를 작별의 장소로 실어나를 것이다.



절대 잊지 않고 곧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즐거웠습니다 가고시마.



다시 만납시다 가고시마.





가고시마의 화산은 굉장하고, 이 가방은 조금 더 굉장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고시마에서 먹은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