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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혁 Jan 04. 2019

여수에서 만난 진수성찬

학교를 다니면서 인턴이라는 명목으로 이곳 저곳을 경험했지만 졸업 후 다닌 회사는 한 곳 밖에 없다. 그나마도 만으로 2년을 채우기가 무섭게 창업을 빌미로 도망치다시피 해버렸으니, 지금은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지나가는 옛 일이 된 지 오래이다.


연구원으로 있었기에 대전에서 일을 했지만 내가 속해있던 사업부는 여수에 공장이 있다. 생산과 직결되는 연구를 하는지라 여수의 소식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조직의 눈과 귀는 종종 그곳을 향했다. 그것 뿐인가, 같은 팀에 일하는 선배들 중에는 소위 '여수물'을 먹지 않은 분들이 없었다. 그 분들의 무용담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는데, 그 양과 종류가 어찌나 다양하고 방대했는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음에도 머릿속으로는 그곳의 모습을 자연스레 그려낼 수 있는 정도였다.



참으로 가깝고도 먼 곳이었다. 퇴사한 지 3년이 되어서야 나는 이곳을 찾게 되었다.



전라좌수영이 자리하던 이곳에는 이순신 장군님을 기리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거북선에 오른 장군님의 자태가 늠름한 이곳의 이름마저 이순신 광장이다. 이 광장에는 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장군님을 도운 분들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그들의 공적 또한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그 중에 원균이라는 이름이 유독 눈에 띈다. 할 말은 차고 넘치지만 지갑이 얇은 탓에 차마 입 밖으로 뱉지는 않으려고 한다.



정황상 실패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지만 구글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점심 한 끼를 위해 구글에 내민 도움의 손길은 배신으로 돌아왔다. 저만큼은 그래서는 안됐다. 제 아무리 인공지능의 시대라고 하지만 아직은 사람이 먼저 아니겠는가. 숙소 사장님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먹어치울 줄 아는 것이라고는 전기밖에 없는 인공지능 녀석이 어찌 맛을 알겠는가. 역시 사람이 미래다. 맛을 아는 것은 사람이다. 미식의 미래는 여전히 사람에게 있다.



그 미래가 바로 이곳에서 펼쳐졌다. 이렇게 광고처럼 보여지는 글을 쓰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지금까지 해 본 적도 없지만 이곳이라면 그런 신념은 잠시 접어둘 만 하다. 부디 이 식당이 없어지지 않고 언제 찾아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라도 나는 이곳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주소 : 전남 여수시 동문로 10-11


소위 말하는 낭만포차 거리에 위치한 식당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포차라는 이름을 하고 있는 것은 이곳이 작년까지는 그 거리에서 영업을 했던 식당이기 때문이다. 뭐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나는 낭만포차의 존재를 여수에 오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고, 이래나 저래나 이곳의 음식이 엄청나게 훌륭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버터철판구이를 많이들 찾으시는 것 같았는데, 나와 친구는 숙소 사장님의 추천을 충실히 따르기로 하여 해물삼합을 주문하였다.


주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온갖 종류의 밑반찬들이 식탁 위를 빼곡하게 메우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맛을 놓고 왈가왈부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입에 넣는 족족 감탄 외에는 뱉어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이 바지락탕은 단연 발군이었다. 한 입 가져간 나와 친구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한 마디 '이건 술안주다', 진정으로 완벽한 술안주였던 이 녀석이 있음으로 하여 주인공을 영접하기도 전에 소주 한 병을 비워버렸다.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잔뜩 흥이 달았다. 왠지 오늘 밤은 길 듯 하다.



드디어 주인공이 등장하였다. 눈으로만 먹어도 싱싱한데, 입으로 가져가면 오죽하겠는가. 여수 앞바다를 끝없이 들이마시는 듯 하다.


관자며 전복이며 문어며, 그 무엇 하나 싱싱하지 않은 것이 없다. 포항 출신인 나와 친구에게 싱싱한 해산물은 잘 구운 스테이크보다 치명적이다. 단언컨데 이보다 치명적인 암살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이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하겠지만, 쉽지 않다.



갑자기 무언가가 한 접시 더 올라온다.


'저희는 이걸 시키지 않았는데요'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오늘의 본 요리인 해물삼합이 바로 이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몰라서 생긴 일이라고 하지만 그만큼이나 이곳의 모든 것이 훌륭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해물삼합은 두 명이서 4만원이다. 친구와 나의 계산기로는 앞서 나온 해물 한 접시에서 이미 한도에 도달했어야 했다. 나와 친구는 지금도 고향집이 포항이니 이 계산은 크게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이 한 접시가 더 상에 오른 것이다. 입이 저절로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꽤나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은 곧 감탄으로 치환되었다. 우리는 고향에서 뭘 먹고 자란 것인가 하는 자조를 빙자한 감탄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재료가 그렇게나 싱싱한데 맛이 없을리 만무하다. 그런데 양마저 상당하다. 도저히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양이 아니다만, 무언가에 홀린듯이 쉬지 않고 입으로 가져가게 된다.



한계에 다다른지 오래였지만 앉은 자리의 관성은 맛의 훌륭함에 비례한다. 친구와 나 그 누구 하나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해병대 유격대대 출신답게 아직도 총을 받드는 그의 각이 살아있다. 이미 민방위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애국충정의 고장 여수에 걸맞는 훌륭한 친구이다.



차마 밥까지 볶게 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미 올라왔으니, 후회해도 늦었다. 참고로 여러개를 볶은 것이 아니다. 딱 한 개 볶았다. 한 개.



맛있는 음식은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감히 비워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친구와 나는 그 대업을 완수하였다. 입이 쉬지 않고 즐거웠던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던 바, 나는 이곳을 반드시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였다.



잘 먹었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낭만포차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비교를 할 수는 없다만, 감히 무의미한 비교라고 조심스럽게 예단해도 될 것 같다. 단언컨데 이렇게 싱싱한 재료를 아낌없이 퍼다주는 해산물 식당은 한국에서 흔치 않다. 부디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이곳을 오랫동안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더불어, 도무지 남을 것 같아 보이지가 않아서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사장님께서도 지금의 인심 잃지 않고 푸짐하게 장사하셔서 더 번창하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신해양 오동도 낭만포차 5번

주소 : 전남 여수시 동문로 10-11





여수의 잔칫상은 겁나 훌륭하고, 이 가방은 겁나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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