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기듯 지나온 시간을 더듬어본다. 흐릿했던 기억들이 선명해진다. 그 속에서 나는 수많은 '나'를 마주한다.
졸업영화를 찍겠다고 며칠을 밤새고 주인공을 이해해 보겠다고 엉엉 울던 나,
첫 회사에서 서툰 발걸음을 내딛으며 땀을 흘리던 나, 누군가와 진지하게 대화하며 많은 생각에 잠기고 세상의 작은 변화들을 발견하고 고민하는 나. 그리고 지금, 거울 속에서 마주치는 낯선 듯 익숙한 눈빛의 나.
시간의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오랫동안 나를 감싸 안은 투명한 굴레였다.
모두를 만족시키려 애쓰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 내 목소리를 낮추었다. 회의 시간, 혹은 친구들과의 약속들에서 “다 좋아요.”라고 말하던 그때의 나.
남들에게 맞추고, 그들 의견대로 따르는 그게 바른 삶이라고 믿었으니까.
어떤 자리를 다녀와도 나는 내 감정과 생각이 기억나지 않았다. 타인의 웃음, 찡그림, 목소리 등 그들의 반응이 전부였다.
그땐 그게 좋은 줄만 알았는데 여러 목소리들 사이를 지나오면 어딘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세월이 덧대어지며 눈치라는 촉수가 자라났고, 또 다른 사회에 던져진다.
요즘의 사람들은 착한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들의 표정 하나에 색이 바래곤 했다. 착하다는 말이 칭찬인지 비난인지 분간하지 못해 밤새 뒤척이던 밤들이 있었다.
착하다, 순수하다는 말에 담긴 이중적인 의미를 해석하려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책 한 권. 서윤빈 작가의 <날개절제술>
버스에서 읽다 가슴팍이 푹 젖도록 간만에 감정 생각 모두 내려놓고 엉엉 울게 한 책.
천사인 아이가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데 인색하지 않고 누군가 자신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주기만을 바라는,
그 천사라는 존재는 홀로 세상에 숨는 이야기.
지나가버려 책장 다이어리 속 여러 기억들.
선뜻 준 마음을 권리로 알던 사람들.
마냥 준 마음을 의심하는 사람들.
그것들이 굳혀져 오래된 습관이 생겼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카페에 앉아있을 때, 혹은 퇴근길 무심코 걷다가도 문득 스스로에게 묻는다. "저 사람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모습일까?"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좋게 말해 타인을 신경 쓰는 나쁘게는 쓸데없는 눈치를 보는 나의 모든 것은 삶의 주인 역할에서의 도망이라고 느껴졌다.
20대 초반엔 내가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여태 성장을 삶의 필두로 걸어온 인생이 뚝 끊겨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상태를 지향하지만 결국은 나를 놓고 혼자 먼 곳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우리는 종종 성장을 직선적인 상승 그래프로 그리곤 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성장은 마치 동네의 골목길처럼 구불구불하다.
때로는 뒤로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제자리걸음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이 결국 우리를 어딘가로 이끈다.
이제는 안다. 착한 마음이 조금 덜해지고, 이타적인 행동이 조금 줄어든다고 해서 그것이 후퇴는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것은 자신만의 경계를 그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때로는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이 더 단단한 성장을 만든다는 것을.
21p. 선생은 더 이상 아이가 다른 원생들의 지렛대를 고장 내는 걸 괄시할 수 없었다. 아이는 게임에서 배제되었다...... 아이는 어쩐지 배설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34p. 적어도 인간사회에서는 모두를 사랑하면 누구의 사랑도 얻을 수 없다.
-날개절제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