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도, 여전히
단 한 번의 가짜 칭찬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것
가을이었다.
시골의 단풍은 매일 죽고 싶다던 엄마의 마음도 들뜨게 했다. 함께 몰려다니던 엄마친구 가족들과 산에 올랐다. 숨 막히는 집구석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바작거리는 단풍잎을 실컷 밟아 으깨는 것도 꽤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사람들 속에서는 화내지 않는 엄마와 있을 수 있었다.
등산 후 막걸리를 한 잔씩 걸친 엄마 친구들은 왁자지껄 가벼웠고,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쪽 구석에 없는 듯 처박혀있었다. 학교 선생님인 아주머니가 과장되게 제스처를 하며 말을 건넨다.
”소연이는 왜 머리카락으로 커튼을 치고 있어? 예쁜 얼굴이 하나도 안 보이잖아~“
“뚱뚱하고 못생겨서요”
“……”
정적이 흐른다. 통쾌하다. 대체 무슨 대답을 바란 걸까? 관심 좀 가져달라고 오버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을까?
“아니야아~ 얼마나 이쁜데! 예쁜 얼굴 내놓고 다녀야지~”
사실 아주머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한참 사춘기였고, 빼빼 마른 땅꼬마였던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 생애 처음으로 통통해진 시기였다. 생애 마지막으로 키가 자란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 몸무게가 평생의 몸무게가 되었으니까.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그때도 빈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빈 말이, 그 말도 안 되는 거짓 칭찬은 나를 평생 따라다녔고, 죽고 싶은 순간에 나를 위로했다.
재미있는 건 그 아주머니가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교육자로서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존경받는 선생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아이들이어서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칭찬이란 그런 것이다.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에게 받는 인정 같은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바람에게서도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언젠가 힘들 때 다시 찾아갈 수 있는 삶의 휴식처 같은 것 말이다. 그래도 살아야 할 일말의 가치는 있는 인간이구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최소한의 동아줄 같은 것.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47kg에도 나는 뚱뚱한 아이
엄마는 중학생이 되어 살이 오른 내 다리와 배를 보고 “어떡하냐”라고 했다. 너는 아기일 때 배둘레가 엄청났다며, 어릴 때 많아진 비만세포는 평생 없어지지 않는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시집보내냐 “며 공부라도 열심히 하라고 했다.
가치관이 형성되기 전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잣대가 곧 세상의 기준이 된다. 부모의 평가는 나가 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못난 아이였다. 공부도, 얼굴도, 몸매도, 엄마 기준에서는 형편없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평가는 나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었다. 습관적 말버릇일 뿐이었다. 자신의 부모에게서 들어왔던 말들을 그대로 반복했던 거였다. 나도 엄마에게 들었던 말버릇을 그대로 두 살배기 아이에게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아유~ 이 배 좀 봐 어떡해~”
물론 내 엄마가 한 말의 의미와 내가 한 말의 의미는 다르다. 마흔이 다 되어서 낳은 막내둥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한 말이지만, 아이가 받아들일 의미는 결국 같을 것이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성장이 멈추고 160cm에 47kg일 때도 엄마는 여전히 “저 다리 좀 봐”라고 했다. 나는 그걸 뚱뚱하다는 말로 이해했다.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 49kg로 되돌아가자 “둘째 낳고 나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안 빠진다”며 미래형 뚱뚱이로도 단언했다. 그러니까 엄마의 잣대로 본 나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늘 뚱뚱한 아이였다. (그 말들이 그냥 습관이었다는 것을, 칭찬해 주면 노력을 게을리할까 일부러 그랬었다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피방식이 하필이면 먹토가 된 이유는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삼삼오오 모여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뒤에서 걱정해 주며 위안 삼고, TV속에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며 위안 삼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손쉽게 평가할 수 있는 상대는 아이다. 그리고, 중심 가치관이 아직 없는 아이는 그것을 세상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엄마의 “과거에도 미래에도 뚱뚱한 아이”라는 왜곡된 논리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나를 정의하는 전부였다. ‘나의 모든 문제는 내가 뚱뚱해서다’는 무의식적인 믿음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것이 내 섭식문제의 진짜 이유, 뿌리 깊이 박혀있던 출발점이었다.
진짜 이유를 찾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분노를 동반한다. 하지만 이것은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원인이 ‘타인이 정한 기준’에 있었음을 알아야 비로소 ‘내 기준’을 세울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의 삶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부모는 이미 인생의 기준을 가지고 아이를 통제하는 위치에 있고, 아이는 부모의 가치를 안고 자랄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부모의 가치로부터 독립해야 하고, ‘엄마 말은 다 틀렸어!’라고 하며 격렬한 사춘기를 통해 자기 가치를 만들게 된다.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들이 뒤늦게 20대에 사춘기를 맞게 되면 부모에게 반항하기는 이미 늦었다. 세상을 향해 반항하면 소위 좌파가 되지만, 여리고 소심해 반항할 수 없는 이들은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이리저리 끼워 맞춰가며 가슴앓이를 한다. 잘 먹지만 날씬하고 예쁜 것이 가치로운 것이라는 기준이 과연 세상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기준일까?
누구나 어른이 되기 전, 나를 정의하던 기준에 대해 반항해 보는 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고 나서 자기 기준을 다시 세워가는 과정을 심리학에서는 인지재구조화라고 한다.
자기 기준을 바꾸라고 하면 여태 나를 잘못 정의해 온 부모 혹은 보호자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분노하면서 그들부터 바꾸려고 든다.
소용없는 일이다.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 세상의 잣대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세상부터 바꿀 수는 없다. 자신의 기준이 명확하고 그것이 내 삶에 완벽하게 밀착되면 주변인들의 생각도 바뀐다.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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