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지키려 내는 몸의 상처
불안과 설렘사이
캐럴이 거리에 낮게 깔리고, 반짝이는 트리 불빛에 크리스마스 향기가 배어난다.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커플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고, 상점에는 선물을 고르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마음이 콩닥거린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고, 가벼운 일렁임이 느껴진다. 몸도 마음도, 땅에서 손가락 한 마디쯤 둥실 떠오르는 듯하다.
불편하다.
불안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크리스마스가 되면 늘 불안했다. 캐럴 소리만 들으면 불편했다. 왜 그런 것인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나쁜 기억은 없다. 크리스마스에 그리 행복했던 기억이 없어서일까 생각도 해봤다. 그렇다면 일상의 하루쯤이어야 한다. 불안해야 할 이유는 없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이 느낌은 불안이다. 그러니까 신체적으로 일어나는 불안과 설렘의 반응이 같아서였다는 것을, 서른 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설렘의 경험보다 불안의 경험 횟수가 많았다는 것, 설렘이 즐거움으로 연결되어 본 적이 없었다는 것도 그때 즈음 기억하게 되었다. 인간의 신체반응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똑같이 두근거리는 반응이 불안을 주로 경험했는지, 행복을 많이 경험해 보았는지에 따라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불안은 늘 내 친구였다. 대학교 1학년, 작은 원룸에서 혼자 보내는 밤을 버티면서 불안은 외로움과 함께 커다란 솜뭉치가 되었다. 그 솜뭉치 덩어리는 집채만큼 커서, 나를 덮칠 듯 쫓아다니다가 제 풀에 지쳐 조각나기도 했다. 밤이 되면 찾아오는 그 공허한 솜뭉치를 피해 나는 먹고 토했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먹고 토했다. 혼자 밥을 먹다가 친구에게 밥 먹자는 연락이 오면 너무 반가워서 먹은 것을 다 뱉어내고 나가서 또 먹었다.
혼자 사는 여대생, 먹토로 향하는 마음의 길
쓰린 위를 붙들고, 밤새 잠을 설치고 일어나 샤워를 한다. 어제는 목에서인지 위에서인지 새빨간 피를 토했다. 이러다 암이라도 걸리는 것 아닌가 덜컥 겁이 난다. 3평 남짓 작은 원룸에서 나와 젖은 머리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생각한다.
'오늘은 정상적으로 먹어야지'
학교 캠퍼스는 초록이 우거져있다. 초록의 틈사이, 비현실적으로 새하얀 목련꽃이 별처럼 총총이 떠 있다. 짓이겨진 내 마음과 달리 어찌나 환하고 반짝이는지. 나는 봄이면 목련꽃을 보기 위해 아무도 없는 주말의 학교를 찾는다. 걸음을 옮겨 목련나무 가까이 다가서면 바닥에 떨어져 상처 나고 찍힌 목련꽃들이 눈에 밟힌다. 이토록 짧은 시간 하얗게 빛을 뿜고 곧 짓이겨질 운명이라니. 꽃을 오래 보고 있지 못하고 곧 자리를 옮기고 만다.
학교 카페로 들어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다. 매점에 들러 사과도 하나 산다. 쓰린 속에 뜨거운 커피를 부어 넣으니 정신이 좀 든다. 새콤한 사과로 울렁거리는 속도 좀 달랬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 꼭대기 층에 올라가 책을 잔뜩 꺼내온다. 몇 장 읽지 않았는데 지겹다. 배가 고프다. 뭔가 먹고 싶다.
뭘 먹을지 두 시간 넘게 고민 중이다. 아까 그 카페에 가서 김밥을 사 먹을까, 학식에 갈까, 오랜만에 학교 밖에 나가서 식당을 갈까. 주말이라 학식에는 메뉴가 하나밖에 없을 텐데.
결국 걸으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학교 식당을 기웃거리며 메뉴를 본다. 식당 안에는 몇몇 여학생들이 밥을 먹으며 공부를 하고 있다. 왜 다들 저렇게 바쁜지 모르겠다. 친구들도 바쁜지 다들 연락이 없다. 교회를 간다고도 하고, 가족모임을 한다고도 했다. 먼저 연락해 볼 용기도 없다.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싫지만 바보같이 배는 고프다. 먹고 싶은 것도 없는데 왜 먹어야 하지. 고민 끝에 결국 김밥 하나를 샀다. 친구들이 사료라고 했는데. 매일 강의실에 갇혀 똑같은 김밥만 먹는다고 친구들이 김밥이 사료라고 했다. 그 생각이 나니까 더 맛없어진다. 맛없는 걸 입에 넣는 게 정말이지 싫다. 먹으면 살찔 텐데. 안 먹고살고 싶다.
늦은 점심을 먹고, 소화되지 않는 불편한 속을 달래며 몇 시간을 걸었다. 많이 먹는 것 같지 않는데 살이 쪘다. 헐렁했던 바지가 꽉 껴서 울룩불룩해졌다. 몸무게는 아주 조금 늘었지만 군살 없던 몸의 형태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바보 같다. 병신 같다. 몸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다. 먹토도 멍청한 짓인데 살까지 쪘다. 살찐 나를 보면 다들 멍청한 돼지라고 손가락질할 거다. 사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눈 주변 혈관이 터져서 얼굴이 퉁퉁 붓고, 식도와 위장은 너덜거리고, 턱은 아프고, 안 그래도 없는 머리숱은 더 줄었다. 이 지긋지긋한 죄책감에서 언제쯤 도망갈 수 있을까.
그래도 오늘은 밥도 한 끼 먹었고 전체 칼로리도 적으니까 성공한 셈이다. 저녁만 잘 넘기면 된다. 조금만 먹어야지. 뭘 사가지고 들어가면 또 먹는 양이 조절이 안될 테니까 밖에서 먹고 들어가야 할 텐데. 그런데 아직 배가 안고프다. 더 늦어지면 혼자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다 문을 닫을 텐데.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고민하며 이 식당 저 식당 기웃거리다 결국 집까지 와버렸다. 아직도 속이 더부룩한데 허기가 진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뱃속이 비어있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허기질까. 오늘 저녁은 그냥 굶어야겠다. 어차피 집 근처에서는 먹을 걸 살 수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별처럼 반짝이던 목련꽃이었지만
TV도 없는, 고시원 같은 작은 원룸에 들어앉아 컴퓨터를 켠다. 밤은 깊어진다. 외롭다. 허기지다. 배가 고파온다. 낱개로 포장된 과자가 눈에 띈다. 딱 하나만 먹어야지. 두 개, 세 개, 네 개를 정신줄 놓고 먹고는 망연자실하고 만다.
'망했다.'
오늘은 어차피 망했다. 집 앞에 유일하게 있는 작은 슈퍼로 간다. 과자와 음료수 정도밖에 팔지 않는 아주 작은 가게다. 라면은 매워서 토하기 힘드니까 부드럽고 달달한 것들과 물 한 병을 산다. 너무 많이 사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적당히. 그리고 오늘도 폭토는 반복되었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하게 지쳐서 잠이 든다. 죄책감도, 자기혐오도, 외로움도 함께 너덜너덜해져서 옅어진다. 별처럼 반짝이던 목련꽃이, 땅에 짓이겨져 갈색의 혈흔을 남기고 죽어가던 모습이 눈 앞에 흩어진다.
그러니까, 이건 자해나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더 아픈 상처를 내버리는 그런 거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기절하듯 잠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