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영 Mar 30. 2018

그곳이 런던이어서 널 좋아했을까

의도치 않은 오래된 여행


-의도치 않은 오래된 여행-

그곳이 런던이어서 널 좋아했을까 







노팅힐게이트 포토벨로마켓



4월의 런던


봄이라기에 조금 쌀쌀맞은 날씨. 런던브릿지 기차역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을 난 아직도 뚜렷이 기억해.

떠나기 전부터 인생 여행지라며 체크해두었던 세븐시스터즈를 가기 위해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어. 4명 이상 기차 티켓을 구매하면 저렴하다고 하여 유럽여행카페에서 만난 동행들과 기차역에서 만났지.

다들 각자 다른 이유로 여행 중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하나의 이유로 우리가 되는 거야.

출장으로 왔다가 잠깐 여행 중인 회사원과 깨가 쏟아지는 신혼부부, 복학하기 전 여행 온 너 그리고 혼자 여행 중인 나. 유심을 아직 사지 못한 나는 허둥지둥 길을 물어 겨우 약속 장소로 도착했어.


“어, 연락이 없으셔서 한 분이 찾으러 가셨는데..” 


네가 연락이 없었던 나를 찾으러 간 모양이야. 그리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네가 뛰어왔어.






세븐시스터즈 가는 길
영국의 로망 2층버스 2층 제일 앞자리에서



“안녕하세요!”


헐레벌떡 뛰어온 네가 웃으면서 나에게 인사를 해주었어. 키가 큰 탓에 목을 제법 젖혀야 네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너는 고개를 푹 숙여서야 나를 볼 수 있나 봐.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서둘러 기차에 올랐고, 우리는 옆자리에 앉게 되었어. 각자 여행루트를 공유하며 웃고 떠드는 사이 세븐시스터즈까지 바래다주는 버스를 환승해야 할 브라이튼에 도착했어. 영국에 가면 꼭 타고 싶었던 귀여운 2층 버스를 타고 계단으로 올라가 제일 앞자리에 자리 잡았어.

확 트인 유리창이 보여주는 풍경은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를 더 설레게 만들었는지도 몰라.







"사진 찍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네가 풍경에 홀려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나를 보고 웃음을 보였어. 그 웃음이 너무 예뻐서 순간 풍경에 반한 건지 너에 웃음에 반한 건지 기분 좋은 착각에 빠졌던 것 같아. 그런 날 있잖아. 이유 모르게 종잡을 수 없는 감정으로 하루가 송두리째 예뻐 보이는 날. 



"아, 잘 찍지는 못하지만.. 카메라 있으신 거 보니 사진 잘 찍으시나 봐요!"

"여행 와서 찍다 보니 더 잘 찍고 싶어 지더라고요ㅎㅎ 오늘 많이 찍어드릴게요!"


카메라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아름다운 풍경이 창밖으로 펼쳐지면 다시금 말없이 우리는 그 시간에 집중했어.

사실 내가 찍는 사진보다 네가 담아주는 내 모습이 더 궁금했는지도 몰라.


 



발걸음을 뗄 수 없었던 나를 쳐다보는 귀여운 녀석



버스에서 내려 처음 내 시선을 끌었던 드넓은 초원과 그 위를 세상에서 제일 한가하게 뛰어놀던 귀여운 소들.

그 사이를 가로질러 한 시간쯤 걸었을까, 우리는 더 말도 안 되는 그림과 마주하고 있었어.






일곱개의 절벽 세븐시스터즈 위에서
2017.04.10 영국 세븐시스터즈



“와 말도 안 돼” “미쳤다” "여기가 영국이라니"


우리는 다시 말없이 카메라를 켜들고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댔어. 일곱 개의 하얀 석회 절벽은 그야말로 대자연의 신비라고 표현해도 될까. 절벽은 사진보다 훨씬 멋있었고, 바람을 맞으며 들판을 거닐 땐 마치 영국의 끝에 서있는 것 같았지. 난 눈을 감았어. 햇빛의 눈부심이 채 감지 못한 두 눈 사이로 새어 들어오고, 절벽에서 내려다보이는 잔잔한 바다 물결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오늘만큼은 혼자여서가 아니라 함께여서 의 감사함을 알았던 것 같아.






런던에서 가장 좋아했던 장소를 꼽으라면 단언컨대 빅벤이라고 말할거야
흐린 날마저 아름다웠던 비온 후의 런던아이








"약속 있으세요?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야경 봐요!"


그날 저녁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고 너와 나는 런던 브릿지 야경을 함께 보았어.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눈에 담아도 모자랐던 타워브릿지도 보면서 한참을 걸었지. 키가 작은 나는 카메라 든 손을 한껏 위로 올려 야경을 담기 위해 솓을 뻗었어. 너는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카메라를 뺏어 들고 너의 시선에서 타워브릿지를 담아주었어.

그렇게 세븐시스터즈 동행으로 만난 우리는 다음날 그리고 그다음 날까지도 함께했어. 우리는 자연스레 말을 놓았고 너의 일정도 내게 맞춰주었어. 네가 갔던 갤러리와 소호거리, 노팅힐 게이트 전부 다시 가주었어. 전시회를 보고 그림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가 벚꽃나무를 보며 조금 이른 봄을 보내기도 하면서 말이야. 노팅힐 게이트 담벼락을 수놓았던 런던의 벚꽃은 우리가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했다고 핑계도 만들면서.



"참 신기해. 런던에서 어떻게 너를 만났을까. 너를"

"그러게. 생각할수록 신기해. 꼭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 같아"

"여행루트만 맞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 런던이 더 좋아졌어"

"런던은 그냥 말도 안 되는 곳이야"



여행 스타일, 좋아하는 사진 색감, 노래 취향까지 닮았던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에 꽤나 빠져들어 해맑은 아이가 되기도 하고, 추운 줄도 모르고 밤이 깊어지도록 빅토리아 거리를 걸었지. 사실 다음날 감기에 걸렸지만 내일 숙소 앞으로 온다는 너의 말이 마지막이기에 우리는 더 오래 걸었을지도 몰라. 함께 탔던 지하철, 같이 먹었던 토마토파스타와 치즈버거, 런던아이에서 바라봤던 노을과 빨간 공중전화 부스 앞 빅벤의 야경은 정말이지 잊지 못할 거야.

적당한 햇빛의 양과 기분 좋은 바람의 오후, 밤이 되면 언제 그랬듯 차가운 공기로 돌아서버리는 런던의 날씨까지 모두 완벽했다고 표현해도 괜찮을까.






런던의 밤을 더 완벽하게 만들었던 빅벤
노팅힐게이트 담벼락에서






그날 밤 숙소를 바래다주며 너는 가방에서 영국 근위병뱃지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어. 그리고 다음날 너는 이탈리아로 떠나야만 하고 나는 다시 혼자로 남아야 해. 그렇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그래. 우리 언젠가는 또다시 만나자. 비록 그곳이 런던은 아닐 테지만 이왕이면 네가 떠났던 날처럼 따뜻한 봄이었으면 좋겠어. 아주 먼 훗날 런던을 떠올렸을 때 우리만 기억하는 그 거리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거야.

그렇게 그렇게 예쁘게 가지고 있어주면 되는 거야.

나는 감히 그날을 런던에서의 풋사랑이라 불러도 될까.

네가 떠나는 그날도 그곳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적당한 햇빛의 양, 잔잔한 봄바람이 불어왔어.

너의 흔적이 곳곳에 흩날리던 런던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아갈 거야.

일 년이 지난 지금도 난 여전히 그때의 우리를 추억해. 열차 옆자리에 앉았던 그 두근거림, 함께 들었던 해변의 백색소음, 짙은 밤공기의 무게 그리고 서로에게 오롯이 집중했던 시간들. 이 정도면 예쁘게 잘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 어느 날 누군가가 내게 "런던은 좋았나요?" 라고 물어온다면 "말하자면 길지요" 라며 조금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남겨두고 싶어.


너의 런던은 어땠어?

-나는 런던이어서 너를 좋아했을까, 너와 함께여서 런던을 좋아했을까.


작가의 이전글 그렇게 런던은 내게 첫사랑처럼 일렁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