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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빛나 Sep 29. 2023

세 마리의 개와 식물

3

 모자 인간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고 엄마 인간이 그걸 받고. 엄마 인간은 지폐를 받고서도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저번에 지폐를 받았을 때는 함박웃음을 지었는데. 모자 인간은 ‘예, 고마워요’ 하고 돌아섰고 올 어쩌고가 담긴 봉지는 흔들렸다. 올 어쩌고는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봉지 바깥으로 삐져나온 가지도 흔들렸다. 식물들 몇이 따라서 한쪽 가지를 흔들었다. 식물들도 이렇게 안녕을 배우는 것이다. 나도 따라서 가지를 흔들었다. 올 어쩌고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올 어쩌고가 아주 작게 보일 때까지, 모자 인간의 형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람이 부는 덕에 우리는 더욱 크게 가지를 흔들 수 있었다. 엄마 인간은 돌아서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꿈으로 와. 꿈으로 오면 너도 키가 큰 나무가 될 수 있어. 눈을 감아도 올 어쩌고의 표정이 떠올랐다. 놀란 표정, 쭈뼛 선 잎사귀들, 떠나며 흔들던 가지.... 베란다에서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바라보는 올 어쩌고의 모습이 그려졌다. 베란다에는 가 본 적도 없지만. 식물들이 소란스러웠다. 어디로 간 거야? 숲에 간 거야. 아니야, 식물원에 갔어. 거기는 우리보다 덩치가 몇 배는 큰 나무들이 있어. 아니? 인간의 집에 간 거야. 그럴 리가. 저번에 내 친구가 거기에 갔다가.... 그럴 리가. 나 아는 애는 인간 집에 가서 잘 살고 있다던데. 식물들 사이에도 근거 없는 소문은 돌기 마련이다. 올 어쩌고가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 몇 년이 지난 뒤 숲에 갈지도. 어쩌면 바람을 타고 식물원에 갈지도. 인간의 집의 햇살이 잘 드는 곳에서 근사하게 자랄지도. 식물에게 최선의 장소는 어디일까. 나는 하늘을 보았다. 대낮이라 가르마가 따끔했다. 햇빛과 눈이 마주치니 목이 더 마른 듯했다. 나는 푸석해진 흙을 바라보았다. 비나 왔으면 좋겠다. 비가 아주 쏟아져서 하늘 끝까지 자라고 싶다. 하늘 끝에는 물이 가득할까. 원없이 물을 마실 수 있을까. 내 흙이 물을 뱉어낼 만큼.... 

 다시 드르륵, 쾅, 하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 인간이 물뿌리개를 들고 나왔다. 아가들 물 줘야지, 물을 줘야지, 하는 혼잣말을 하며 엄마 인간은 오른쪽에 있는 식물들부터 물을 주기 시작했다. 먼저 물을 마신 식물들을 보며 다른 식물들이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조삼모사가 생각이 나는군. 나는 왼쪽의 가장 끝에 자리하고 있다. 내 차례가 오려면 한참 남았다. 식물들은 가지를 벌리며 엄마, 엄마 했고 엄마 인간은 당연히 듣지 못하므로 물 주기에 바빴다. 물을 마신 식물들은 배가 부른 듯 입맛을 다셨고 몇은 물이 부족한 듯 떠나간 엄마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았다. 엄마 인간은 물뿌리개에 물을 채우기 위해 세 번은 왔다갔다 했다. 저럴 바에는 거대한 물뿌리개를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엄마 인간도 사서 고생하는 부류인 듯하다. 그나저나 엄마 인간은 가끔 우리를 팔아넘겼지만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 하루에 두 번은 식물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픈 식물이 있으면 영양제를 주기도 하고, 계란 껍질을 주기도 하고, 가끔 우유를 주기도 하고. 입맛이 까다로운 식물들은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도 엄마 인간의 애정 표현 방법이라고 생각하니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리는 듯했다. 엄마 인간은 식물들에게 물을 주며 잎 하나하나를 확인했다. 조심스럽게, 행여나 상처라도 날까 싶어 세심하게 관찰했다. 벌레들이 좀먹거나 병에 걸린 잎이 있으면 상황에 맞는 처방을 했다. 엄마 인간은 우리의 모든 것. 의사가 되기도 하고 엄마가 되기도 했다가 가끔은 선배가 되기도 했다. 엄마 인간은 손님이 없을 때면 낮은 접이식 의자를 가지고 나와 왼쪽 선반과 오른쪽 선반의 중심에 의자를 펼치고 앉아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엄마 인간이 하늘을 볼 때면 그의 아이들인 식물들도 하늘을 보았다. 엄마 인간은 가끔 혼잣말도 했다. 정확히는 우리에게 하는 말이었다. 무럭무럭 자라라. 키가 아주 커지는 거야. 멋진 식물이 되는 거야. 꽃도 피우는 거야. 열매도 맺는 거야. 그렇게 좋은 식물이 되어서 엄마 호강 좀 시켜 줘라. 식물들 몇은 네, 했다. 하늘을 보는 엄마 인간의 뒷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우리에게 말을 걸고 나서 한참을 하늘을 보고 있다가 엄마 인간은 노래를 듣곤 했다. 나는 그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 엄마 인간이 재생한 노래를 듣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뿌리부터 기운이 솟았다. 5초에 1M씩 자랄 수 있을 것처럼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노래를 듣다 엄마 인간이 하는 말도 좋았다. 

 좋은 노래를 들으면, 좋은 식물이 될 거야. 좋은 말을 들으면 튼튼하게 잘 자라고, 나쁜 말을 들으면 성장이 더뎌.      


 나는 좋은 식물이 되고 싶어서 엄마 인간이 튼 노래를 열심히 들었다. 열심히 듣는다는 게 뭔가 싶겠지만, 말 그대로 열심히 들었다. 집중해서. 옆 식물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든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엄마 인간의 노래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매일 좋은 식물이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떠 있던 한때. 언젠가 엄마 인간은 나에게 물을 줬고, 여느때처럼 잎들을 세심히 관찰하다 혼잣말을 했다. 얘는 정말로 안 팔리겠어. 잘 팔리지 않는 식물은 어떤 식물일까. 나 같은 식물? 나 같은 식물이 어떤 식물일까. 엄마 인간은 내가 미워서 나에게만 나쁜 노래를 들려준 걸까.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팔리지 않는 식물이 된 걸까. 엄마 인간은 나의 어떤 점 때문에 잘 팔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 이후로 나는 내 몸을 구석구석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나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면 언제나 슬퍼지는데, 본격적으로 슬퍼지기 직전 엄마 인간이 나의 앞에 서 있었다. 엄마 인간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엄마 인간과 눈을 마주했다. 엄마 인간은 물뿌리개를 내 쪽으로 내미는가 싶더니, 물 한 방울도 주지 않고 가 버렸다. 내 잎은 왜 살피지 않는 거지? 내가 이미 다 커서? 다른 식물들에게 줄 물이 부족해서? 내가 이미 좋은 식물이 아니어서? 결정이 나서? 결판? 다짐 같은 것? 엄마 인간은 내 앞에서 나와 눈을 마주했던 몇 초간, 어떤 결심을 했을까. 나는 엄마 인간처럼 158cm 정도가 되어서 엄마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들여다본다 해도 엄마 인간의 본심에는 불투명한 막이 쳐져 있을 듯하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들여다보며 엄마 인간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나는 왜 팔리지 않는 식물이냐고. 나는 엄마를 호강시켜 줄 수 없는 거냐고.      


 그만. 

 이런 부정적인 상상에는 끝이 없는 법이다. 부정적인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지루해지는 것이다.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로, 신물이 날 정도로 빤해지는 거다. 슬픔에도 정도가 있는 법. 나는 오늘 정해진 분량의 슬픔을 다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 가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엄마 인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엄마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않는다, 않는다, 않는다.... 않는다는 생각을 계속하다가 내 시선에 들어온 건, 움푹 들어간 오른쪽 옆구리. 평평한 왼쪽 옆구리와 평행하지 않는 엇나간 옆구리. 나는 가지를 살짝 내려 나의 결점을 가렸다. 앞을 바라보았다. 차들이 쌩쌩 다니고 어느정도 배가 찬 식물들이 조잘거렸다.      


 엄마 인간이 나에게 처음으로 물을 주지 않은 날, 나도 어떠한 결심을 한 것이다. 언젠가 이 좁은 화분에서 벗어나,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튼튼한 뿌리로 화훼 단지를 탈출하겠다고. 둥근 지구의 끝이 어디인지 확인시켜 주겠다고. 엄마 인간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 인간이 미운 것은 아니었다. 대신 엄마 인간과 나를 분리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엄마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엄마 인간,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식물인 것으로. 오로지 나의 마음을 생각하다 보니 해는 지고 엄마 인간이 화훼단지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멀리서 개들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아우, 하는 소리가 연달아 세 번. 엄마 인간은 소리가 어느 쪽에서 난 건지도 모르면서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내 생각에는 왼쪽인 듯한데. 엄마 인간은 가게의 문을 잠그고 머리카락을 몇 번 매만지고서는 우리에게 말했다. 

 잘 자, 얘들아. 내일 봐. 

 식물들은 엄마도 잘 자요, 했다. 엄마 인간이 떠나고 나면 어둠과 함께 세 마리의 개들이 몰려올까? 아우, 하고 울었던 저 멀리에서부터, 가게 앞에 놓인 먹이의 냄새를 맡고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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