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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빛나 Nov 10. 2019

신이라면

망가지려면 제대로 망가져 보고 싶습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무언가가 박살이 나서, A/S도 교환도 불가능했으면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고 끊임없이 자라나고, 낳는 것처럼 낫기 때문에 제대로라는 말을 가져 볼 수가 없습니다. 모순적입니다. 나는 분명 흠이 없는 인간인데 나의 일부인 정신에는 흠이 가득합니다. 문장은 불완전하고 하루에도 몇번씩 무너졌다, 흐트러졌다, 뒤덮였다 다양하고 졸렬하게 재생합니다. 의식은 수도꼭지처럼 흐릅니다. 나는 이 의식을... 좀 가둬 두고 싶습니다. 환경에도 절약이 필요한데, 인간을 위해서도 절약이 필요하다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가둘 수 있는 의식이라면 그건 의식일까요. 가둘 수 있는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존재를 벗어난 단어가 되지는 않습니까. 사랑은 어떻습니까. 그럴듯한 말에 불과합니까. 지금 내가 써내려가고 있는 말을 어떻습니까. 신이라면 이런 말들을 쓸까요. 이런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아담과 이브를 내동댕이친 것을 후회할까요. 지구는 왜 둥근지, 내가 걷는 땅은 왜 평평한지. 나는 왜 이렇게 작은지, 나무는 왜 나보다 거대한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입니다. 오늘 있었던 가장 이상한 일, 이 금주의 주제입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상합니다. 물을 꼴깍꼴깍 마시는 것처럼 이상합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는 것처럼 웃기고 이상합니다. 죽고 싶다 생각하면서 살고 싶다 생각합니다. 내 안에 두 명이 살고 있는 겁니까. 나는 나를 한 명의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까. 나는 나를 가끔 3인칭으로 부르는데, 나는 미쳤습니까.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이상하게... 너무나 내가 타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발이 푹푹 빠지는 시를 읽어본 적 있습니까. 나는 아직 없습니다만... 아주 키가 큰 대나무에 매달려서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시는 읽어본 적 있습니다. 그런 시가 어디 있냐 물으신다면 나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아주 단순하고 바보 같지만 길이 있고 골목이 있어서... 읽어야 압니다. 그렇다면 나를 읽으실 겁니까.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의 나는 꼭 없는 사람처럼 붕 떠 있고 또 축 가라앉아 있어서 정도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럴싸한 단어로 치장도 해 보려 합니다. 밝은 모니터 화면에 벌레가 붙었습니다. 화면 밝기를 0%로 줄입니다. 화들짝 놀라며 떨어져 나갑니다. 어둠에도 사람이 놀랄 수 있을까요. 아니, 사사람이 아니라 벌레가... 스산한 마음이 될 수 있을까요. 어둠을 마주할 때 나는 넓다는 단어를 마구 낳습니다. 둥글지는 않고 세모난 모양으로 태어납니다. 넓다는 말은 세모납니다. 모서리가 많고 찔릴 구석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나는 외로움에는 당당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긍정을 좀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태껏 너무 많은 긍정을 사고 팔아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소모한 것들. 소모한 피와 살가죽들. 몇 개의 손톱과 커터칼이 그걸 말해 줍니다. 소독솜으로 골고루 닦여 서랍장 안에 누워 있겠지요. 긍정을 위해 나를 못살게 군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좀 더 나은 기분을 위해 당장의 나를 박살내야만 한다면, 낼 수 있겠습니까. 나는 박살내 보려고 했었습니다. 너무 많은 긍정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하얀 얼룩은 디자인입니까. 긍정은 패션이 될 수 있습니까. 치장할 수 있습니까. 나는 이제 스타일을 좀 달리하고 싶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긍정과 부정이 섞여들었으면 싶습니다. 부정이 어색하지 않았으면 싶단 말입니다. 할 수 있다는 말에 한치의 고민도 없이 아니라고 답하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아닐 수도 있는 사람이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신이 아닌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자기합리화에 뛰어난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 구석으로만 발이 뻗어 있는 지긋지긋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몇 개의 문장을 떠나보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몇개의 자책과 비판을 못 본 척 넘겼는지는 정확히 기억합니다. 일곱입니다. 행운의 숫자입니다. 그릇을 깰 뻔했고 표정을 구길 뻔했습니다. 쌓인 설거지가 하기 싫어서 그릇을 노려보았고 고양이가 사랑스러워서 꽉 끌어안고 싶었습니다. 사랑에 빠질 뻔했습니다. 이렇게 몇 개의 실수로 하루를 채웠습니다. 한심합니까? 알면서도 수십번을 사랑에 끄덕일 뻔했습니다. 그래, 사랑이지. 고양이는 사랑이고, 고운 가루가 겹겹이 쌓인 것 같은 구름도 사랑이고, 어쩐지 타이밍 좋게 온 버스도 사랑이고, 지나치는 사람들도 사랑이라는 착각을 했는데, 한심해질 수 있습니까? 사랑을 너무 잘 발견하는 것도 재주가 될 수 있습니까?

 정확하고 오차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동작이 빨랐으면 좋겠고 결심이 뚜렷하고 선명했으면 좋겠습니다. 일식칼보다는 중식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네모낳고 커다랗고, 닿기만 해도 레고처럼 정사각형이 될 것만 같은 그런 결심을 원합니다. 글을 쓸 때에도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모호한 표현을 집어던지고 싶은데, 나는 운동 신경이 좋지 않은 편이라 던지는 것에 능하지 않습니다. 굴릴 수는 있습니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멈추긴 하지만요. 내가 쓰는 글이 재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내가 재미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스러우면 뭐하고, 귀여우면 뭐합니까. 사람이 좋으면 뭐하고, 긍정적이고, 쾌활하며 친절하면 뭐합니까.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고. 넷플릭스를 보고,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어도 즐거운 건 즐거운 거고 성장은 성장이라고. 가끔 나와 세상이 동떨어져서 평행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중랑천을 걷다 뿌리가 뽑혀 쓰러져 있는 나무를 볼 때 그렇습니다.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만 하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중랑천 한 가운데 서서 미친 세상아, 하고 외치고 싶지만 마음 속으로 메아리만 칠 때... 그 메아리가 하필이면 돌덩이로 이루어져서 커다란 멍이 남았을 때 그렇습니다.

 나는 쌓이고 쌓인 마음을 곱게 빗기 위해 요상한 글을 씁니다. 엉키면 빗어 줘야지요. 머리카락이 엉켰다고 해서 무작정 자르지는 않지 않습니까. 괜찮아지기 위한 위로이자 도전입니다.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것 같은 성찰과 반성입니다. 이 게시글에서 성찰과 반성을 찾으셨습니까. 최면에 빠지신 건 아닌가요. 어쩌면 세상이 지켜봐 온 모든 내 모습이 거짓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고양이를 아주 세게 끌어안을 수 있고, 무지막지하게 사랑을 퍼부을 수도 있습니다. 강아지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눈물을 모으고 모았다 갈비뼈를 허물어 세상이 눈물에 잠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움에 허덕이다 아무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 살고 있던 사람 몇 명을 내쫓을 수도 있습니다.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굳이 몇 번 뒤돌아보는 로맨스 영화 같은 설정을 넣기도 합니다. 지긋하고 무섭지요. 나는 참 빤하고 어이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앞서 몇 개의 필요를 말했습니다. 삶에도 필요가 있을까요. 나는 지금 더이상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느끼고 있다가 아니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가 더 정확하겠습니다. 모호한 표현이 정확할 때도 있다니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애매로 가득찬 모호한 세상이 미워 죽겠습니다. 나는 선이 아니고 구불구불한, 선도 아니고 입체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받아들여야지요. 오늘 했던 두 번의 통화에서 들었던 말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좋게 좋게 생각해야지요. 그러려니 해야지요. 하늘을 찢어재끼고 먹물을 휙 쏟고 싶지만, 나는 문어도 아니고 뛰어난 변장 능력도 없고 하늘을 뒤덮을 만한 몸집도 없으니 참아야지요. 오늘도 내가 봐준다, 하는 마음으로 넘어가려 하지만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욕을 하고 싶은데, 나는 대체로 도덕적인 이미지라 젠장이라고밖에 못하겠습니다. 제기랄입니다. 젠장이고 제기랄. 5월 20일은 모르는 것을 알려 주었기 때문에 뭉쳐다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게 그렇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자꾸만 굴러가는 거죠. 굴러가다 보면 바위가 자갈이 되는 것처럼 어느새... 박혀 있는 장소도 달라지고, 살아야 하는 곳도 달라지는 거죠. 운명이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내가 내일 죽거나 산다면 나는 단순히 죽거나 사는 사람입니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는 없습니까. 죽거나 살기 직전에 먹었던 마지막 식사를 알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워했던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까요.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 궁금해할까요. 살았는데도 지옥이거나 천국일 수 있습니까.

 나는 생각이 좀 짧습니다. 좀 많이 짧습니다. 생각을 할 줄 모른다는 말이 정확합니다. 머리에 좋은 생각밖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솜뭉치만 들어찼기 때문에... 내가 사실 인형이라 그러면 믿을 겁니까. 나이를 먹고 초췌해져 가고 있는데, 나는 인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말이 안 된다고 그러지만서도, 나는 생각이 짧은 걸요. 비만 오면 머리가 축축 처지고 무거워지는데... 일리가 없습니까. 생각은 안 하는데 내 머리는 왜 이렇게 무거울까요. 몸에서 커다란 부피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나는 왜 머리에 물을 들이고 묶거나 모자를 덮어씁니까. 필요도 소용도 없는 거 ,아예 망토로 덮고 다니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그건 싫습니다.... 눈은, 꼭 내 신체를 벗어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멸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미적지근한 웅덩이에 드러누워 배영을 하고 싶습니다. 진정이 될 것 같습니다. 발자국에 얼굴도 빠트리고 코로 물도 몇 번 마시고 물에 빠져 다시는 진정이라는 걸 못할 지경이 되도록 진정해야겠습니다. 멸망이라는 말이 참 둥근 것 같습니다. 분노는 둥급니까. 분노와 멸망은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데, 왜 하나는 터지고 있고 하나는 멈춰서 둥글게 얼어 있습니까. 무슨 차이입니까. 칠십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 지구 말고, 박민아 나 한 명이 살고 있는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습니다. 평행 세계로 택배를 보낼 수 있습니까. 폭탄은 배송 가능합니까. 국제 배송입니까, 국내 배송입니까.

 자괴감이 듭니다. 나는 글을 너무 못 쓰는 것 같아. 소설도 못 쓰는데, 시에는 좀 더 안 맞는 것 같아. 애초에 언어라는 건 내가 가질 수 없는 것 같아. 그렇다고 치면 감정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치고, 치고, 또 치다 보면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내가 썼던 소설처럼 아주 0의 인간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슬픔에 빠졌다 하면 이 지경이 됩니다.

그렇지만...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백 살하고도 두 살 더 살고 싶습니다.

 졸리고... 내일 또 일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내일 또 망가진 인간이 될 생각에 두렵습니다. 내일도 어이없어하겠지요. 내일 하루도 싫어하겠지. 내일도 밥 먹기 싫어하겠지요. 그런 와중에 여름이 다가오고 있겠지요. 시간이 흐르겠고 하루겠고 2019년이겠지요. 스물이겠지요. 스물이지만 성년은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내일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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