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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빛나 May 12. 2023

순애

내가 너를 좋아하면 안 되는 걸까. 자기 전에 천장 모서리를 쳐다보면 귀신이 나온다는 얘기를 하며 눈을 껌뻑이던 너를 사랑하면 안 되는 건가. 빠른 속도로 음료를 마시고 얼음을 과일마냥 와그작거리는 너를. 그렇다면 반대로, 나는 정말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하는 네가 나를 좋아하면 안 되는 걸까. 그 말이 나를 향하지는 않았지만, 너는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너는 분명 나를 사랑해. 순애의 모습이다. 순애에는 두 가지 뜻이 있어. 첫 번째는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라는 뜻이고 두 번째는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침. 내가 널 사랑하려고 어떤 짓까지 하는 줄 알아? 나는 네가 외출한 사이에 우디향이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허공을 바라봐. 우디향은 네가 자주 쓰던 향수 냄새. 호불호가 갈리는 향이라 사적인 공간에서만 쓰고, 타인과 함께 있을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며. 근데 내 앞에서 우디향을 풍기고 나에게도 그 향이 묻어나고 네가 없을 때도 나에게서 우디향이 나고 그 결과로 네 생각이 자꾸 나고 그런 거면 사랑하는 거 아니냐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 아무튼.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허공을 바라봐. 아주 작은 벌레의 비행에도 벌벌 떠는 너를 위해서 나는 방금 막 태어난 듯한 초파리 새끼도 죽인다. 초파리도 말이야. 자세히 보면 귀여워.

초파리 자세히 본 적 있어? 현미경으로 보는 거 아니고 뚫어져라 애정을 가지고 본 적이 있어? 생각해 보면 너는 싫어하는 표정이 참 귀엽다. 미간을 살짝 좁히고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입을 벌리고. 내려간 눈꼬리를 한 상태로 혀로 입술을 한 번 훑고 ‘싫어’ 하고. 그러고는 무안해서인지 웃잖아. 살면서 지구에 상처를 준 적이 없는 사람처럼 무결하게. 아무런 죄도 없는 웃음으로. 나를. 나를 보면서 싫다고. 나는 너한테 초파리를 보여주고 싶다. 원래는 말이야, 벌레를 죽이면 나는 벌레가 들러붙은 휴지를 구겨서 주머니에 넣고 그랬는데 오늘은 침대 옆에 뒀어. 큰 벌레는 아니고 초파리야. 초파리는 휴지로 눌러서 죽여도 형태 보존이 꽤 잘돼. 상태가 좋아. 다리 몇 가닥만 끊어지고 몸통 부분이 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귀여움은 여전해.

...

승호야.

나는 지금 너네 집 창고 안에 있어. 작동하지 않는 선풍기가 있고 읽지 않는 책들이 쌓여 있고 너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물건들이 가득해.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화를 내듯 무너지기도 해. 나는 창고의 빗장에 얼굴을 붙이고 너를 봐. 김치찌개를 먹고 밥을 한 번 떠 먹고 우물거리며 휴대폰을 보고 기분 좋게 씻고 나온 네가 물을 뚝뚝 흘리며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터는 걸 보고 외출 준비를 하는 걸 보고 계란말이를 태우는 너를 보고 멍을 때리는 너를 보기도 하고 깊게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너를 봐. 이곳은 곰팡이가 사는 곳이라 굽은 어깨를 조금이라도 펼치려 하면 하얀 옷에 얼룩이 묻어. 나는 네가 참 좋다. 나는 네가 뭘 하는지 궁금하고 듣고 싶어. 근데 듣는 걸로는 만족이 안 돼서 보러 오는 거야. 너는 아직 귀가하지 않았어. 뭘 입을지 모르겠어서 네가 빨래바구니에 넣어둔 검은색 티셔츠 입었어. 베이비 파우더 냄새가 나. 분명 땀 냄새인데. 습하고 묵은 빨래 냄새가 나는데 그 속에서도 베이비 파우더 냄새가 나. 네가 운동 끝나고 늘 뿌리는 거. 땀 냄새 풍기고 다니기 싫다고 뿌리던 거, 내가 사 준 거. 그니까 너도 내가 좋지?

...

좋아한다, 보고 싶다,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말을 있잖아. 나는 왜 간단하게 끝내기가 싫지. 장황하게 얘기하고 싶어. 나의 순애에 대해서.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러니까 응당 너도 나를 사랑해야 된다는 걸. 너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알려 주고 싶어. 네가 초대하지 않았는데 네 집에 들어왔을 때는 꽤 무서웠거든. 범죄잖아. 주거 침입. 근데, 나는 너를 위해서 뭐든지 바칠 수 있는데 내 인생 하나 못 바칠까? 내가 너 때문에 범죄자 되고 빨간줄 하나 생기면 우리 인연이 더 질겨지는 거 아닐까? 어떻게 끊어내고 싶어도 절대 끊기지 않는 팽팽한 줄처럼. 나는 그 줄을 붙잡고 있어. 매달았다. 나는 어두운 창고 안에 있어도 네 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네 걸음은 특이해. 터벅터벅 걷지 않고 터 벅터 벅. 터 벅터 벅터 벅 하다가 문 앞에 멈춰서면 나는 그때부터 숨을 참아. 행복해서 심장이 입 밖으로 내뱉어질까 봐. 그래도 나쁘지는 않겠다. 심장은 마음이니까. 내가 널 좋아하는데. 심장 따위 못 줄까 봐?

터 벅터 벅터 벅. 나는 이제 숨을 참는다.

하나 둘.

*

일정이 없는 날에는 늘 승호를 사랑하는 일을 한다. 사랑하는 것도 일이 될 수 있고 그 일은 대체로 보호해 주는 것이다. 승호는 험한 세상을 살기에 겁이 많다. 내가 그를 보호하는 방법. 안전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 다니기. 일부러 발소리가 잘 나지 않는 신발을 신었어. 너를 소리 없이 쫓아다니려고, 완전히 그림자 인생을 살아 보려고 어둡고 침울한 신발을 샀어. 내 취향은 이렇지 않은데. 나는 소리를 내며 걷는 걸 좋아하는데. 근데 그걸 좋아하는 마음보다 승호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다. 초파리와 맘모스 정도의 차이로. 멸종이 되었는가, 아직 존재하는가의 차이.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가능성. 0.1%라고 해도. 나는 원래 검은색 구두를 신고 다녔는데 그 구두는 지금 신발장에 방치되어 있다. 먼지를 이불 삼아 숙면을 취하고 있다. 겨울도 아닌데 겨울잠을 재웠어. 이치를 거스르기도 해야지. 나는 늘 파격적으로 사랑해. 이게 내 순애의 모습이다. 승호가 카페 앞에 서서 담배를 꺼낸다. 나는 스타프라자 건물 옆에 있다. 복싱 센터가 있고 학원이 있고 카페가 있고 음식점이 있고 승호가 있다. 승호는 담배를 물고 하늘을 바라보고 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승호를 바라본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피우지도 않는 담배의 맛을 상상하며. 이마를 타고 땀방울이 굴러떨어진다. 지겨운 여름이지만 하나도 지겹지가 않다. 잠자리들이 팽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애정 행각을 벌인다. 잠자리들도 사랑하는데 나라고 너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나의 취미는 합리화. 내 사랑은 순애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은근히 썩어 있는 것 같다. 비둘기 한 마리가 절뚝거리며 옆을 지나간다. 완전하지 못한 존재는 사랑스럽다. 완전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오늘 하루도 완전하지 못하지. 물에 빠진 종이 같은 상태. 흐물거리고 약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질 것 같은 매일. 아끼는 컵이 깨진 오전 8시 39분과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계. 물이 범람한 하천, 정확하지 않은 일기예보. 노스트라다무스. 멸망으로 가득 찬 세상과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 종교. 엄마랑 아빠 중에 누가 더 좋아. 우리는 무슨 사이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더 이상 자라지 않는 화분. 빠르게 성장하고 죽는 버섯. 향균 소독 물티슈로 닦아내도 모습을 드러내는 곰팡이. 버스를 기다리다 현관에 두고 온 지갑이 떠올라서 황급히 돌아가는 승호. 컵을 자주 쏟는 승호.

웃을 때 입을 가리고 웃고 알이 없는 안경을 쓰고 머리를 말리지 않고 귀를 만지는 습관이 있고 눈을 자주 깜빡이고 입술을 물어뜯고 손톱을 물어뜯고 덧니가 있고 새끼 손가락이 약간은 휘어 있고. 커피보다는 얼그레이를 좋아하고 고양이보다는 새를 좋아하고 특히 시트론 코카투라는 사랑한다고 말할 줄 아는 앵무를 좋아하고 공드리의 영화를 좋아하고 낮보다는 밤을 좋아하고 바쁘게 굴러가는 낙엽과 고장난 지퍼 무더운 날 잠수하기를 좋아하고 자기는 이왕이면 세상의 모든 걸 사랑하고 싶다고 그랬는데 그렇지만 결코 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랑스러운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승호를 보고 있으면 입이 찢어질 것 같아. 나는 승호가 담배를 피우는 그 짧은 시간 안에도 이렇게 많은 걸 생각할 수 있다. 승호는 불을 끄고 카페에 들어간다. 나는 승호가 서 있던 자리에 간다. 버려진 동물처럼 우디향이 있다. 나는 승호가 있던 자리에 서서 승호가 물고 있던 담배 꽁초를 바라본다. 고개를 돌려 둥그런 눈으로 메뉴판을 보는 승호를 보고 승호는 나를 보지 않는다. 메뉴판의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전체를 훑고 나서 말하겠지. 얼그레이 차갑게 한 잔이요, 마시고 가겠습니다. 영수증은 안 주셔도 돼요. 절제된 모습이 좋다. 너무 좋은 나머지 파괴되고 싶다. 이미 파괴 중일지도 몰라. 나는 해체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한껏 기쁘다가도 한껏 죽고 싶다. 애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씨발을 생각한다. 승호는 진동벨을 받아들고 구석으로 가 자리를 잡는다. 터 벅터 벅. 나는 그의 박자를 따라하며 카페로 들어간다. 메뉴판을 훑지는 않는다. 얼그레이 한 잔 차갑게요. 터 벅터 벅. 승호가 앉아 있는 곳에서 최대한 먼 곳에 앉아서. 보호하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승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승호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안녕하세요, 혹시 유니폼은 어디서 갈아 입으면 될까요, 하며 묻던. 나는 처음부터 내가 승호를 사랑하게 될 줄 알았다. 그리고 승호도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승호는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을 빌려 주고 늘 친절하고 다정하고 지구 상에 유일하게 남은 가브리엘인 듯하고.... 나는 개처럼 승호를 좋아했다. 개같이. 승호를 더 자주 보고 싶어서 근무 시간도 바꾸었고 승호에게서 나는 우디향을 개처럼 맡고 승호가 출근하는 걸 기다리고 퇴근하는 걸 기다리고 사랑을 갈구하는 개처럼 쫓아갔다. 안전 거리를 유지하며. 여기서 안전 거리라는 것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거리. 들키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거리. 들켜 보려고 했는데 승호가 싫다고 해서.

이게 뭐예요?

벌레 무서워하시잖아요. 그런데 얘네도 자세히 보면 귀엽거든요. 저도 원래는 끔찍하게 싫어했는데 움직이지 않으면 꽤 볼만해요. 아무런 자아가 없으니까 발버둥치거나 그러지 않고 순종적이거든요. 얘네는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이 상태에서는. 저는 벌레 잘 잡아요. 제가 다 잡아드릴게요.

아, 괜찮아요.

사양 안 하셔도 되는데. 저도 정말 괜찮아서 그래요.

그게 아니라... 너무, 너무 싫어서요. 

벌레가 싫다는 뜻이었을까. 카운터 쪽에 새끼 바퀴벌레가 나왔고 승호는 기겁을 했고 나도 새끼 바퀴벌레를 만지고 싶지 않지만 잡았다.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 이러하다. 어때. 나는 내가 가진 패를 보여 줬는데. 나는 너를 위해서 싫은 것도 기꺼이 할 수 있어. 나는 승호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싫어서요, 하는 표정이 귀여워서 나는 그날 이후로 자꾸 싫은 행동을 했다. 옆구리를 찌른다든지. 승호의 앞치마 주머니에 녹은 초콜릿을 넣어 두기. 끈적하게 만들기. 승호는 그럴 때마다 계속 싫어했고 싫어하고 싫어할 거고 너무 싫다면서 결국은 그만 뒀다. 나는 승호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어. 내가 좋아할 수만 있다면 그만이다. 나는 일방적으로 사랑해도 외롭지 않다. 가끔 승호를 물어 보고 싶을 때는 있다. 말 그대로 깨물어 보고 싶다. 창고에 숨어 있다가 승호가 잠들면 손가락 끝을 깨물어 볼까, 하고 고민도 했는데. 깨무는 순간 승호는 잠에서 깰 거고 승호를 바라봄은 중단될 것이고 나는 정말로 파격적으로 사랑하다 파괴될 것이고 해체될 것이고 승호를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 승호는 얼그레이를 마시면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데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내가 귀신이었으면 마음 편하게 널 쫓아다녔을 텐데. 가끔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며, 겁을 주기도 하고 정말 수호신처럼 너를 지켜 주기도 하며. 영적인 존재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요즘은 진지하게 죽는 걸 생각해 보고 있어.

승호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처럼 너 사랑할 사람은 또 없어. 없을 거야. 내가 지켜 줄게. 나 너를 사랑할 수만 있다면 인생 공쳐도 상관없어. 너 낭만 좋아한다며. 

나는 카페에 앉아 승호를 한 시간 반 정도 바라보다 집으로 간다. 승호의 집으로. 지스타빌 302호. 승호는 집을 더럽히지도 않고 청소를 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먼지는 계속 쌓인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얼그레이를 버리고 카페를 나선다. 나는 승호를 좋아하는 거지 얼그레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눈이 건조한지 꿈뻑이는 승호. 피곤한 듯하다. 얼른 집으로 돌아와. 돌아와서 쉬어. 이따 봐. 승호에게 들리지 않을 말을 전한다.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날이 더워 죽어 버린 지렁이를 지나치고 벽돌 사이를 뚫고 자라나는 식물을 밟으며. 밟히면서 자라야 더 튼튼하게 잘 자라니까 나는 지구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나도 많이 밟히고 살았어. 생각해 보면 그렇게 밟힌 적은 없지만 거부당한 적은 많으니까. 거부하는 게 마음을 짓밟는 거 아닌가. 거부할 거면 처음부터 시작을 하지도 말든가. 시작한 적도 없지만. 승호의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 이렇게 걷고 있으면 세상 끝에 서 있는 사람 같다. 아무것도 가질 게 없고 가지고 싶은 것도 없고 너무나 만족스러운 나머지 1초 뒤에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당신은 곧 죽을 것입니다, 하는 노스트라다무스를 만날 것 같은 사람. 예, 그렇습니까. 하고 하염없이 걸을 것 같은 사람. 

엘리베이터를 탄다. 문이 닫히기 직전 중년의 여성이 허겁지겁 엘리베이터에 탄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나는 목례를 하고 상승하는 숫자를 바라본다. 1, 2. 여성과 나는 대각선으로 서 있다. 급하게 왔는지 여자의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나는 부러 숨을 죽인다. 여성의 숨소리와 내 숨소리가 섞이는 건 왠지 이상하게 느껴져서. 여성은 다른 층수를 누르지 않는다.

302호 사시는 분 맞죠? 그 총각이랑.

아, 예.

자주 마주쳤잖아요. 그 총각이 얼마나 싹싹해. 볼 때마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도 잘 하고. 머리 스타일 바꾸면 바로 캐치해서 잘 어울린다고 하고.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봤을 때 없다고 그러더니, 이렇게 고운 아가씨를 두고 왜 없다고 그랬대. 내가 50년 넘게 살아 보니까 여자 마음처럼 남자 마음도 어려워. 어렵지?

여성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얘기를 한다. 나는 아, 예. 하고.

사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래요.

좋을 때네. 들어가요.

여자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뱁새처럼 총총거리며 간다. 좋을 때네. 좋을 때네. 좋을 때지. 사랑하면 늘 좋을 때지. 승호의 집 앞에 택배 상자가 놓여 있다. 나는 도어락을 누르다 말고 택배에 적힌 운송장을 본다. 의류. 운송장 번호는 630558910130. 김승호. 의류. 며칠 전에 옷장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옷을 샀나 보구나. 승호가 얼른 집에 돌아왔으면 좋겠다. 어떤 옷을 샀는지 궁금하다. 승호가 얼른 집으로 돌아와서 생수를 마시고 신나는 표정으로 택배 상자를 열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갈아입었으면 좋겠다. 도어락을 누르고 들어간다. 요즘 내 행복이 뭔지 아니, 너네 집에 숨어 있는 거야. 거기서 너의 흔적을 보고 취미를 보고 취향을 감지하고.... 네가 생활하기 편하도록 물건을 정리하고. 먼지를 훔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하수구 구멍을 막고 있는 네 짧은 머리카락을 한 가닥씩 집어내고. 싱크대의 물얼룩을 지우고. 나는 청소포가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고, 네가 사놓고서 발견하지 못하는 물티슈도 어딨는지 알고 있어. 가스레인지 아래 선반에 있어. 나는 매일 냉장고를 열어서 너를 걱정해. 승호야, 마요네즈도 먹을 수 있는 기한이 정해져 있다. 계란도 그래. 한 달 지난 계란이 있는데 거기 어제 산 계란을 섞어 두면 어떡하니. 복불복이야? 그런 계란 먹었다가 속에서 병아리 태어나. 내가 정해 뒀던 규칙이 있어. 최소한의 선. 양심이 버티고 막아서던 그런 선이 있다. 오늘 깨려고. 

싱크대에 있는 얼룩을 제거했다. 싱크대 거름망에 껴 있던 이물질도 하나하나 빼냈어. 구멍에 걸려 있던 숙주나물 같은 거. 거기서 쉰내가 나는 건데 승호는 아무것도 모르고. 꽤 더러워진 청소포를 버린다. 냉장고를 바라본다. 승호가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사오는 마그넷이 붙어 있다. 제주도에 갔을 때 사 온 돌하르방 마그넷. 요코하마에서 사 왔다는 기모노 마그넷. 기분이 꿀꿀해서 샀다는 고양이 마그넷. 나는 냉장고 앞으로 가 마그넷의 위치를 바꾼다. 흐트러져 있으니까 정갈하게. 줄을 세워. 절제된 듯이. 일자로. 물론 약간은 삐뚤게. 흐트러진 모습이 사랑스러운 거니까. 승호가 약간은 이상함을 감지하게. 네가 싫어하는 표정이 보고 싶다. 그나저나 나는 승호가 여행을 가는 게 싫다. 외박하는 것도 싫다. 물론 승호가 얼마간 돌아오지 않을 테니 마음 편하게 승호를 체험할 수 있는 건 좋지만 보고 싶다. 보고 싶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나는 네 이불을 덮어 쓰고 너의 베개를 끌어안고 네 sns 프로필 사진을 본다. 보고 싶다.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겠지만. 나는 네가 보고 싶다. 지금도 보고 싶다. 승호은 언제쯤 오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냉장고 문을 연다. 모든 건 끝이 있는 법이라고. 기한이 지난 건 버려. 먹지도 못할 거 왜 먹니. 냉동칸에는 작년 생일에 먹다 만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있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냉동 닭가슴살이 있고 딸기맛이 나는 아이스크림과 칼로리가 적은 아이스크림이 있다. 그 옆에는 음식물 쓰레기 봉투가 있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꺼내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꺼낸다. 상태는 멀쩡해 보이지만 냉동칸에도 박테리아가 살아. 승호처럼 음식물 쓰레기를 얼려 두면 박테리아가 살아. 먹었다가 죽을지도 몰라. 설마 죽기야 하겠냐만은 내가 너를 사랑할 확률 역시 적었던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게 승호가 아니라 민호나 강호나 그런저런 사람일 수도 있는데 내가 굳이 너를 사랑하듯이. 너는 굳이 의심스러운 음식을 먹고 굳이 아프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굳이 숨어 있기만 할 수도 있는데 너를 위해서 청소를 하고. 생각을 하니 나는 승호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구나. 웃음이 나온다. 반쯤 대가리가 파인 모습의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조각내며 웃는다. 나의 사랑이 뿌듯하다. 좋은 사랑을, 긍정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마이너스가 됐다가 플러스가 되면 그냥 0인 것처럼. 딱 이 정도로만 사랑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나는 파괴한다. 아이스크림 케이크와 입구가 굳어 더러워진 마요네즈와 물이 돼 버린 딸기잼과 누가 봐도 썩은 것처럼 보이는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김치와 시들해진 상추 같은 것들. 아마도 흰자가 검어졌을 듯한 계란과 딱딱해진 빵까지. 없애 버린다. 승호는 모든 걸 사랑할 자신이 있다면서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아. 이걸 언제까지 먹을 수 있는지, 이 마음이 언제까지 유효한지. 벚꽃을 보고 싶다면서 개화 시기를 알려고도 하지 않아. 그런 허술함이. 앞과 뒤가 다른 게. 좋다. 완전하지 못한 점이. 전혀 두렵지 않은 척하면서 쩔쩔 매는 게 귀여워. 기대가 돼. 이것저것 버리다 보니 냉장고에 빈 공간이 생겼다. 비포와 애프터가 확연히 다르다. 나는 조금 더 나아가 보기로 한다. 옷장 정리를 해 줄게. 그렇게 옷을 벗어서 아무렇게나 두면 있잖아, 옷이 구겨져서 테가 안 나. 너는 깔끔한 게 잘 어울린단 말이야. 

승호는 가지고 있는 옷이 많다. 입지 않으면서 추억이 담겨 있다며 버리지 못하는 타입의 남성. 옷장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옷들을 전부 꺼낸다. 스웨터와 반팔과 반바지와 면바지 청바지 그런 것들을. 모두. 부끄러우니 속옷과 양말은 건들지 않는다. 승호도 숨기고 싶은 건 있을 테니까. 옷을 네모반듯하게 접는다. 강하게 털어서 먼지를 날리고. 주름이 잡히지 않게. 너도 마음에 들어할 정도로. 고맙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는다. 승호야, 나는 되게 소박한 사람이야. 마음 속으로 생각해도 되지만 굳이 내가 혼잣말을 하는 이유는 있잖아. 너는 말의 힘이라는 말을 알아? 한 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어. 그 말이 얼마나 역사 깊은지 알아? 내가 이렇게 너네 집에서 말을 하잖아. 그러면 말이 바닥에 가라앉는 거야, 먼지처럼. 지금 내가 옷을 털 때 날리는 먼지처럼. 사랑해, 하면 사랑한다는 내 말이 바닥에 가라앉겠지. 네가 집으로 돌아와서 바닥이 거뭇해진 양말을 벗고 맨발로 걸어다니면 어느 순간 사랑한다는 내 말이 네 발바닥에 붙겠지. 그러면 사랑한다는 마음이 전달이 되는 거야. 너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말이 너한테 가서 거머리처럼. 나는 네가 참 좋아. 네가 가끔 바보 같고 우습고 그렇지만, 그래서 더 좋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말이 바닥에 가라앉는다. 심해에 사는 생물은 연구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이치인 거야. 그거랑 이거랑 똑같애. 나는 심해 생물이야. 내 사랑은 기저에 깔려 있고. 너는 그냥 모르는 채로, 영영 연구하지 못하는 채로. 좋다. 나는 이런 사랑이 좋아. 나의 순애가 좋아. 너무 좋아서 죽어 버리고 싶어, 여기서. 마음만 같아서는 죽기 직전에 승호에게 발견되고 싶다. 

상상한다. 하얀 카펫이 깔려 있는데 거기서 내가 손목을 긋고 누워 있으면 피가 나겠지. 승호가 아끼는 하얀 카펫이 빨갛게 물들겠지. 너는 터 벅터 벅 복도를 걸어오고 차분하게 도어락을 누르고 문을 열고 어항을 탈출한 열대어처럼 누워 있는 나를 본다. 누구세요, 하려나. 싫은 표정을 짓겠지. 나를 기억하려나. 기억하려나. 기억하려나. 제발 나가 주세요, 하려나. 구급차를 부르려나. 나를 살리려나. 아니면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려나. 때리려나. 피가 나는 손목을 지혈해 주려나. 너는 마음이 여려서 울지도 모르겠다. 나는 흐려지는 시야를 붙잡고서 말하고 싶다. 나는 네가 참 좋아. 말에는 힘이 있는데.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해 버렸으니까 내가 죽더라도 내 말은 살아남아서 너를 쫓아다닐 거야. 그림자처럼. 내가 죽더라도 내 마음은 좀비처럼 살아서 너를 계속. 그러다 죽으려나. 거기까지만 말할 수 있으려나. 상상이 막을 내리고 나는 새하얀 카펫에 대자로 눕는다. 마음이 간지럽다. 좋아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네모난 천장이 나를 바라본다. 초파리는 더 이상 날아다니지 않는다. 나는 승호를 사랑한다. 나의 사랑은 순수하다. 순애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라는 뜻이고 두 번째는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침.

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 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 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터벅. 

이런 내가 무서워? 싫어? 너도 모순적이면서.


승호의 옷에서는 우디향이 난다. 순서 없이 마구잡이로 옷이 쌓여 있던 옷장이 깔끔해졌다. 승호의 우디향을 만진 내 손에서는 승호의 냄새가 난다. 오늘은 이 정도로만 개입한다. 나는 창고에 들어간다. 승호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물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된다. 곰팡이 냄새를 맡는다. 고요하다. 창고의 빗장으로 승호의 방을 바라본다. 바닥에는 내가 뱉어낸 문장들이 가라앉아 있다. 나는 약간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 승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발소리가 들리고 나는 그 발소리의 주인이 승호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린다. 웃음이 멈춰지지 않는다. 도어락을 누르고 승호가 돌아왔다. 승호는 화장실에 가 손을 씻는다. 그 다음 옷장을 연다. 정적. 움직이지 않는다. 놀랐니. 얼마큼? 심장이 두근거린다. 웃음이 자꾸 나온다. 귀엽다. 놀란 표정이 보고 싶은데 조금만 더 왼쪽으로 나와 주면 안 될까. 승호는 침대에 걸터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만진다. 그러더니 옷장을 다시 열고 사진을 찍는다. 전화를 한다.

우리 집에 도둑이 든 것 같아.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야. 그리고 도둑이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나야. 승호는 손톱을 깍깍거리며 물어뜯는다.

물건이 없어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옷들이 다 정리돼 있어. 나는 정리한 적이 없는데.

두려움에 떠는 승호는 귀엽다.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니까 내가 좋아하지. 승호는 전화를 하며 집을 둘러본다. 침대 옆에 내가 놓아두었던 휴지를 줍는다. 휴지통에 넣는다. 침대를 뒤적이고 서랍을 열어 본다. 냉장고도 열어 보지 그래. 냉장고가 빅 이벤트야. 띵동, 소리가 들린다. 승호는 전화를 끊지 않고 누구세요, 한다. 응, 나 305호 사는 아줌마야. 아가씨랑 같이 과일 좀 챙겨 먹으라고. 승호는 문을 연다. 아가씨요? 하고 묻는다. 여성이 말한다. 응, 그렇게 고운 여자친구가 있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는데, 둘이 같이 먹으라고.

네? 저 혼자 살고 여자친구도 없는데요.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조금만 더 웃다가는 웃음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다.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웃긴지 모르겠다. 여성이 말한다. 아까 아가씨 들어가는 것도 내가 봤는데. 승호는 어영부영 대화를 끝내고 문을 닫는다. 창고는 왜 안 열어 봐. 네 관심 밖의 물건들이 거주하는 곳이라서? 생각도 나지 않아? 당장이라도 승호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만 부르지 않는다. 나는 조금만 더 너를 관찰하기로 했어. 조금만 더. 그리고 창고를 열어도 있잖아. 숨을 수가 있다. 나는 체구가 작거든. 어떻게 숨을지도 다 생각을 해 뒀거든. 들키면 들키는 거고. 사랑을 들킨다고 해서 사랑을 멈추면 그건 순애가 아니다. 그게 어떻게 순애야. 나는 너를 사랑할 수만 있다면 못할 짓이 없다. 승호는 다시 전화를 한다. 아마도 경찰에 전화하고 있는 듯하다. 스피커로 돌린다. 나 들으라고 그러는 건가. 경찰은 승호에게 일단 다른 곳에 가 있으라는 말을 한다. 집에 있으시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승호는 네, 네, 한다. 금방 오시나요. 깍깍거리며 손톱을 물어뜯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더 이상 초파리도 없으니까. 네가 무서워하는 벌레는 없고 네가 무서워하는 나는 있다. 너는 꿈에도 모르겠지. 나는 여전히 너를 좋아해. 네가 떠나가면 사랑한다는 말 백 번만 더 뱉어내고 나갈게. 그러고 다음에는 승호야, 집 구조를 바꿔 줄게. 창문 바로 아래에 침대가 있으면 감기 걸려.


나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는다. 몸이 떨린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너는 싫어하는 표정이 참 귀엽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경찰과 통화를 끊지 않은 채로 집을 나선다. 터 벅터 벅. 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나는 지금 너네 집 창고 안에 있다. 너의 관심 밖의 물건이 되어서. 너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서. 나는 너를 순애한다.


나의 사랑은

순수하고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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