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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치너머 Mar 24. 2021

자고로 모든 정치인은 사상가여야 한다

'4.7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와 제반 정치 현안', 그 너머의 이야기

1. 자고로 모든 정치인은 사상가여야 한다. 삶의 궤적에서 획득한 자기 철학이 존재하여야 하고, 그 철학을 바탕으로 본인이 그려온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자기 철학이 확립된 채로 비전이 제시되어야만, 비로소 민주주의라는 공간에서 ‘토론’과 ‘검증’을 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무언가를 건드리고 바꾸려는 사람일수록 마땅히 사상가여야 한다. 정치는 언제나 실전이기에, 길을 모르거나 운전대를 잘 못 잡는 사람에게는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 물론 사상가여야 한다고 해서 가방끈이 긴 학자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사상은 학문을 하며 외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고뇌를 통해 내적으로 깨우치는 거다.

1-1. 문재인 정부가 실패의 길을 걷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정부는 기본적으로 국정을 관통하는 광의의 철학이 없었다. 대신 사안마다 미시적으로 대응하고 관리하기에 바빴다.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검찰, 부동산, 그리고 교육을 보면 그 부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윤석열과 조국이라는 인적 요소에만 매몰된 검찰개혁은 이미 명분을 잃었다. 집값 안정이라는 미시적 관리에만 국한된 부동산개혁은 LH발 투기와의 전쟁에서는 맥도 못 추고 있다. 공정이라는 환상에 중독된 교육개혁은 개혁이라는 이름조차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단지 검찰과 부동산의 종속변수로서 민심 수습책의 희생양이 되기 일쑤였다. 잘못 건드리는 건 안 건드리는 것보다 더 나쁘다. 문재인 정부의 진짜 잘못은 건드린 게 아니라 잘못 건드린 거다. 이제 잘못 건드린 대가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식의 더 큰 역행의 비용으로 돌아올 것이다. 철학의 빈곤은 필연적으로 정치의 실패를 가져온다. 문재인 정부가 그 공식을 다시금 증명해주고 있다.


2. 그렇다고 해서, ‘중도’라는 철학은 존재할 수 없다. ‘제3지대’라는 진영도 존재할 수 없다. 기존 진영에서 기계적 중립을 찾으려는, 그러나 기존 진영 없이는 설명될 수도 없는 그런 종속변수들에는 감히 사상이나 진영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없다. 그들은 겉보기에 상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토론과 검증이 두려워 회피해왔던 이들에 불과하다. 또는 정치에 ‘기성’이라는 외피를 씌워 막연한 대중 혐오를 조장하고, 이를 통한 탈정치의 이미지를 본인의 자산으로 독점해왔거나. ‘중도’라는 언어는 민주주의를 회피하는 비겁한 세력에 ‘합리’와 ‘온건’이라는 외피를 부당하게 씌우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주권자의 이익에도 분명 반하는 일이다.

2-1. 결국 안철수는 또 철수했다. 본선도 아니고 예선에서 철수했다. 나는 이전부터 안철수의 철수를 예측했고 또 바랐다. 기본적으로 진영 내 경선에서는 분산되는 이미지만으로 밀집되는 조직을 이길 수 없다. 바라기도 했던 이유는 위와 같다. 안철수는 이번 경선을 통해 그가 지키려 했던 중도라는 환상마저 사실상 무너뜨렸다. 국민의힘과의 합당 발언은 오히려 양반이다. 문빠를 그렇게 비난하던 사람이 태극기부대까지 끌어안겠다고 나섰고, 이 모든 우클릭을 반문연대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명분으로 합리화했다. 그에게 대안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번 경선 토론에서조차 상대방을 반대하거나 전임자를 반대하기 위해 수시로 본인의 입장과 논거를 바꿔대는 모습에서 나는 그에 대한 마지막 연민을 버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안철수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제 단지 문재인과 민주당을 싫어하고 싶은 정치적 내면에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탈정치적 외피가 씌워지길 원하는 이들로밖에 안 보인다. 어서 그 환상에서 깨어나길 기원한다. 당신들이 욕하는 그 정치인들만큼 당신들도 충분히 정치적이기에.


3. 또 하나의 문제는 자기 철학과 시대 흐름 간의 괴리에서 발생한다. 앞서 얘기한 대로 정치인의 자기 철학은 각자의 삶의 궤적에서 깨우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의 정치인이란 주권자의 선택 없이는 무의미하므로, 개인의 삶의 궤적에서 시작했을 자기 철학은 언제나 주권자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주권자의 거시적 흐름을 앞서거나 최소한 따라는 가야 한다. 잘 세울수록 굳건해질 자기 철학이 역설적으로 시대 흐름에는 언제나 가변적이고 열려있어야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 시대 흐름이 그의 삶의 궤적에서는 겪지 못한 낯선 것일수록 새 흐름 수용의 개인차도 더욱 커질 것이다. 결국 시대 흐름을 수용하여 진화한 철학과 정치인은 살아남고, 자기를 지키려다 시대에 뒤처진 철학과 정치인은 도태될 것이다. 그게 대의제가 민주주의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핵심 원리다.

3-1. 애써 봉합하려던 뇌관을 임종석이 또 터뜨렸다. 사실 민주당이 이번 재·보궐선거에 나서기로 했을 때부터 이런 무분별한 2차 가해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주변에서 임종석 발언의 정치적 저의를 분석한 글을 읽었다. 선거 국면에서 하등 이득 될 게 없어 보이는 이런 발언을 스스럼없이 쏟아내는 저의를 임종석의 자기 정치라고 분석했다. 그 견해에도 동의하지만, 나름 여의도에서 586세대와 일해본 사람으로서 그렇게 복잡하게까지 뜯어볼 필요도 없겠다고도 생각했다. 이전에 박원순 전 시장 성비위와 관련해 쓴 글 중 ‘공공 기억’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좋아하는 보좌관님과도 이 사안에서만큼은 평행선을 달리는 걸 경험하면서 그 세대에게는 민주화 운동과 진보 시민운동 때의 공공 기억이 너무도 지배적이라는 걸 느꼈다. 그들의 그런 공공 기억 속에서 박원순은 언제나 고생만 한 짠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상호나 임종석의 그런 발언도 생각보다는 복잡한 저의 없이 그들 깐에는 순수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더 쉽게 얘기하자면, 손익을 따질 것도 없이 그냥 충동적 감정으로 지른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거다. 솔직히 입 아프게 굳이 언급하며 욕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들은 시대 흐름보단 자기 철학을 선택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천천히 도태되어 갈 것이다. 단, 진정 문제가 되는 건 그런 자기 철학이 어떤 주권자에게는 계속해서 폭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양심을 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폭력은 분명하게 욕하고 시정해야 한다.


P.S. 오늘 문득 든 생각을 흩어지기 전에 모아두어야 할 것 같아 조금은 다급하게 문장을 썼다. 분량이 제한되어 못 쓴 말이 많다. 여유가 된다면, 각각의 주제를 별도의 글에서 다시금 다루려고 한다. 특히 문재인 정부와 철학의 빈곤에 관한 이야기는 보고, 듣고, 느낀 게 워낙 많아서 시일 내에 꼭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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