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지은 Jun 06. 2023

10명의 개발자와 일하고 있습니다

개발, 그 안에는 우주가 있어요

10명의 개발자와 일하고 있다. 나는 디자이너지만 개발팀에 속해있기 때문에 개발에 최적화된 조직 문화에 적응하려 노력 중이다. 개발자들이 일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먹는 것, 말하는 것, 입는 것까지 틈틈이 관찰하고 때로 기록하며 개발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이 일은 생각보다 즐겁다. 개발자의 관점으로 디자인을 다시 보게 만들고, 그것이 오히려 디자인을 제대로 볼 기회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최근 회의를 하다가 그들의 대화에서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API를 태우다"라는 표현. 한 개발자가 다른 개발자에게 API에 태워서 어떻게 해달라는 식으로 썼다. API의 사전적 정의는 구글에 검색하면 자세히 나온다. 그보다 내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API란, 백엔드 개발자들이 자꾸 만들어 내는 것이고, 프론트엔드 개발자들이 매번 가져다 쓰는 것이다. 그 API라는 것에 "태우다"라는 동사를 결합한 표현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옮기는 개발자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했고,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한 개발자에게 왜 그런 표현을 사용하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개발자가 API를 태운다고 말할 때, 그들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운송 수단은 자전거나 자동차, 버스가 아니라 배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 마주치는 흔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왜 배일까? 휴가철에 탑승하기를 몹시 기다리는 비행기도 아니고 왜 배일까? 


디자인을 둘러싼 표현 중에 비교할 만한 사례가 있는지 곧바로 찾아보았다. 늘 마음에 걸렸던 표현 하나가 금세 떠올랐다. 바로 "디자인을 입히다". 몇 년 전, 회사 대표로부터 종종 들었던 말이다. 대표는 디자이너가 아니었지만, 공공 디자인, 제품 디자인 등을 다룬 기사에서도 같은 표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표현에서 느껴지는 디자인의 무게는 내가 회사에서 들이는 힘을 가볍게 느껴지도록 만들어 마음이 언제나 불편했었다. 


옷을 입힐 수 있는 대상의 크기와 무언가를 실어 나를 수 있는 배의 크기까지 비교하고 나니 과거에 느꼈던 불편함은 두 배로 커졌다. 물론, 아침에 등원하기 싫어 떼를 쓰며 거실 바닥에 드러눕는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옷을 입히는 일과 한적한 공원의 구석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배를 연못에 띄우는 일을 비교한다면, 같은 목적어와 동사를 쓰더라도 그 무게감은 이전과 정반대가 되겠지만. 


마음의 자세는 일상의 언어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디자인을 말하는, 디자이너가 아닌 이들이 디자인에 대해 가지는 심상과, 동료 개발자들이 매일 모니터 앞에서 가지는 마음가짐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엿본다. 디자인 문제들은 얼마나 온순한 것으로 비치는가, 개발자들의 시야는 얼마나 광활한가. 


개발자들과 더 원활하게 소통하고 싶어 파이썬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 개발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도움이 될만한 유튜브 채널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갈구하는 내 눈빛을 모르지 않았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개발, 그 안에는 우주가 있어요. 우주를 이해하고 싶으신 거예요?" 회의 시간에, API를 발사하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우연일까. 내가 탐내는 지식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 그들이 올려다보는 세계의 깊이가 얼마나 무한한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작가의 이전글 아보카도 양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