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부른다. 현재 6살이 된 내 아이가 생후 몇개월도 채 안된 아기였을 때는 울면서 우리를 불렀다. 거의 대부분은 자신이 불편하고 불만족스러움을 알리기 위함이라 우는 것으로 아내와 나를 부른다. 아기가 울음으로 우리에게 불편과 불만을 내비치면 우리는 그걸 접수하고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그래야 새벽 한 밤중에 깬 상태에서 다시 잘 수 있으므로) 처리해주려 한다. 불편이 사라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무표정으로 자신의 상태를 한번 더 확인한 후 만족스럽다고 느껴지면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아기의 사랑스러운 미소는 우리가 그 아이의 불편함을 잘 접수하고 만족스럽게 해결해 주었다는 의미로 내리는 상이다. 새벽 한 밤 중에 일어나 우는 아이를 달래는 고단함에도 그 미소로 우린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있었고 행복과 환희로 피곤함을 잠시 씻을 수 있었다. 어쩌면 불공정해 보이는 광경(혹은 거래)이지만 진실로 아이는 그 미소 하나만으로 모든 보상을 내릴 수 있었다.
내 아이가 나를 아빠라고 처음으로 불렀을 때가 언제였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의미 깊은 순간이었을 텐데. 아마 아이와 함께 있는 매일매일이 그만큼 의미 깊은 날이었기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위로해 본다. 이제 내 아이는 도움이 필요하거나 함께 놀고 싶을 때, 원하는 게 있을 때 나를 부른다. 이제 언어적 소통이 능숙한 아이는 자기가 무언가를 갖고 싶을 때 갖고 싶은 이유를 변명처럼 늘어놓으면서('그래도~ 그래도~' 전술을 자주 쓴다.) 최대한 나를 설득하려 노력한다. 마치 내가 아내에게 새 카메라를 사기 전에 아내에게 왜 이 카메라가 특히 좋은 것이며, 이미 꽤 좋은 미러리스 카메라가 있지만 새로 사게 될 이 카메라로 우리의 사랑스러운 딸을 얼마나 더 잘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브리핑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미 장난감이 있음에도 또 다른 장난감을 원하는 아이를 마냥 타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른 부모들도 물론 마찬가지이겠지만, 나는 아이가 나를 부르는 게 좋다. 물론 아이가 나를 부르는 것이 짜증 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씻기고 아내가 퇴근하기 전에 나도 얼른 내 찝찝한 몸을 개운하게 씻고 싶어 10분 안에 샤워를 끝내려 할 때, 그 사이를 못 참고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말이다. 어떨 땐 샴푸 거품 때문에 눈을 반만 뜬 채로 아이를 변기에 앉힌 적도 있다. 아마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흔히 있는 일일 것이다. 그 순간이 참 난감하고 '왜 하필 지금이니!'라고 속을 원망스러워하기도 하지만, 나도 그런 모습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에 기쁨을 느낀다. 어쨌든 아이가 날 필요로 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그 부름이 나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에 도움을 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나는 아이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응답하는 내 목소리에도 다정함이 묻어 나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