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관

나는 재판관이 아닌 부모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할 것

by minus

법정 모습은 이렇다. 재판관은 그곳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밑에는 변호사는 가장 위에 앉아있는 재판관을 올려다보며 억울함과 주장을 호소한다. 부모와 아이는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비유가 아닌 실제로 말이다. 키가 큰 부모는 자연스럽게 아이를 내려다보게 되고 아직 키가 다 자라지 못한 아이는 항상 무언가를 갈구하거나 호소하는 듯한 자세로 부모를 올려다보게 된다.


나는 서로를 바라보는 이 다른 시선이 각자의 위치에 대한 무의식적인 오해를 갖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오해란, 부모는 아이의 행동에 대한 죄의 유무 판결을 내리고 아이는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오해이다. 물론 부모는 아이에 비해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춘 성인이며 아이를 가르쳐야 하는 책임이 있지만 그것이 곧 아이의 행동에 판결을 내리는 권위를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 또한 하나의 개인으로써 자율성을 보장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그 자율성은 부모도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단, 안전하지 않거나 다른 이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주 안에서. 안전하지 않다면 자율성은 의미가 없고 남에게 피해를 끼쳐도 되는 자유는 이 세상에 없으니 말이다.


아이는 자율성으로 파생되어 저지르게 되는 실수와 잘못을 경험으로 삼아 고쳐나가며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몸집과 키가 작은 아이는 부모의 시선 속에 쉽게 노출되어 부모로부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의 유무를 평가받게 된다. 이런 이유로 내 아이가 어느 곳에 있든 나의 시선이 닿는 탁 트인 넓은 장소보다 내가 자리에 없는 방에서 유독 더 자유로워 보이는 건 기분탓이 아니리라.


사춘기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아이와 부모는 점차 비슷한 눈높이를 갖게 되고 드디어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만으로 아이의 독립성과 자율성에 대한 욕망이 강해지는 건 아닐 것이다. 이미 아이는 태어나면서 독립과 자율성의 본능을 지니고 있었고 키가 자라면서 마침내 그것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시선의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긴 해도 이 시선의 차이는 부모는 더 이상 손쉽게 아이를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는 무릎이 좋지 않아 앉고 일어서는 게 꽤 힘들지만 아이를 위해 시선을 맞춰주기 위해 자주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숙이려 한다.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말이다. 단순한 이 행동 하나가 내가 단지 성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아이를 쉽게 판단하지 않게 도와주는 장치가 되어줄 거라 믿는다. 내 가치 판단으로 아이를 판결 내리지 않고, 그 대신 나와 내가 속한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공유하고 아이가 스스로 행동에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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