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가적일상추구 Jul 06. 2021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한 사람의 이야기지만 누구나 겪는 성장통으로 여겨진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말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듣고 어느 정도 공감했을 나이에 대한 대명사급 언어로 다가오는 말이 아닐까 한다.

가수 김광석의 '서른 즈음'과 함께 왠지 서른 하면 이제 청춘은 끝나고 삶이라는 무거운 의무를 위해 살아야만 하는 존재로 바뀌는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강박에 가까운 상징으로 남아 있는 시(詩)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감상해 보자.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것을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것을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르리란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中 1994년


막상 시를 감상해 보면 이게 모지?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내용은 왠지 맨얼굴에 주름이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에 한숨지으며 급여통장의 잔고와 거주지에 대한 걱정에 젊음의 잔치는 끝나고 생계의 압박에 시달리는 청춘의 끝자락의 한탄을 노래했을 것만 같은데 느닷없이 시는 학생운동과 투쟁가를 운운하며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을 해버리는 상황에 요즘 세대뿐만 아니라 이 시를 처음으로 접해보는 이라면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는 386세대라는 현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세대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주변으로 인식하는 한 지식인의 자기 성찰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1961년 생으로 1980년 서울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로부터 총격을 받아 사망한 후부터 우리 사회가 혼란에 빠졌느냐? 사실 그것보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하려 지속적으로 헌법을 개정하다 1972년 10월 17일에 선포된 제7차 헌법 개정 이른바 유신헌법이 11월 21일 국민투표로 발효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우리 사회는 혼란에 빠지다(물론 이전의 역사가 평화와 번영의 역사가 아닌 것은 누구다 아는 사실이다. 시인의 삶으로 좁혀 생각하는 의미로 이런 표현을 쓴 것뿐이다) 이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부정과 투쟁을 목도했으며 그 곪은 상처가 터지는 1980년에 대학에 입학을 한 것이다.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라는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라는 역사의식이 넘치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 영화감독 이창동 님으로부터 영화배우 제의를 받았다고 할 만큼 뛰어난 미모로도 관심을 받았던 시인 최영미

그래서 시인은 의무처럼 대학 2학년인 1981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내 시위에 참여했다 구류 10일에 1년간 이어진 무기정학을 처분을 받게 된다.

사실 이때 진정으로 민주화 투쟁에 나선 많은 선. 후배 및 동료들은 차디찬 감옥에서 투쟁의 기치를 들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그리고 몇몇은 목숨까지 잃어가며 1980년대 학생운동은 그야말로 뜨거운 피로 끓어오르며 전개되었으며 1987년 기존의 간접선거제를 유지하겠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선언에 맞서 호헌철폐 투쟁으로 이어져 마침내 1988년 직접선거제로 개헌을 단행하게 되었으며 1993년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선거로서 평화적으로 문민정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많은 변수가 있지만 그래도 소위 대학 물먹고 자유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담고 투쟁한 386세대가 이룬 성과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하기에 그들의 노고를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 후 대한민국 정치에 있어 핵심이 된 세대이기도 하다.

그런 세대의 중심에서 출발했던 최영미 시인. 한때 마르크스와 레닌의 책을 번역하고 사회정의에 대해 고민했지만 그녀의 삶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주변인의 삶이었다.

심지어 서른이 넘어 취업을 위해 작은 고시원의 갇혀 지난 젊은 날을 되돌아보니 앞으로의 생계에 대한 두려움에 찬 차가운 현실밖에 남은 것이 없는 초라한 잔치였다.

그 기록을 시로 적어내어 199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내놓은 것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이다.

책은 서점가를 휩쓸며 50만 부 이상을 팔았다고 했다.

시인 그 후 10년을 무위도식하며 도도한 작가의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그 책의 위력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를 것이 그저 하나의 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반영한 무언가 우리들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던 무엇의 발현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파급을 우리에게 주었던 시집이다.

전쟁 같았던 1987년 6월 항쟁

사실 1980년대 학생운동(민주화, 노동운동 등)을 말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저 나는 공교롭게도 1980년의 시작을 서울대학교 입학으로 시작하여 우리 사회의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곁에서 지켜보며 어느덧 서른이 된 자신의 모습과 비교해 보니 정작 자신은 무엇 하나 변변히 이루지 못한 채 취업 준비를 위해 어두운 고시원에 갇힌 모습을 보며 그 찬란한듯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과거에 어떤 회한이 묻어있지만(자신의 모습에서 시인은 다른 대다수인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인간 사회의 큰 틀은 헤겔의 변증법적으로 또다시 무언가에 대한 투쟁으로 잔칫상은 차려질 것이라는 예언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시詩 1994년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석- 여승(女僧)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