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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Aug 13. 2021

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생각해 보면 마키아벨리즘이 왜나쁜 의미로사용되는지 이해불가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대표작 '군주론' 예전에 일독한 기억은 있지만 도무지 책의 내용은 기억나는 것이 없다.

이따금 서양의 책을 보면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해서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 정도로 내게 인식되어 있는 정도가 전부일뿐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군주론'을 꺼내들고 읽은 결과 이제는 부정적이라는 의미보다 그 안에 있는 참된 의미 즉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 이태리의 상황을 빗대 봄으로써 그가 왜 이런 책을 썼는지에 대하여 이해하니 마키아벨리의 집필 의도가 그리 나쁜 의미는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책은 서두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밝히고 있듯이 소책자 정도의 분량으로 장황한 내용의 책이 아니기에 차차 살펴보기로 하고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의 이태리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에 나름의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피렌체공화국의 피렌체 시내 전경

사실 이태리의 역사를 잘 모르는 우리에게 오로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이야기 정도만 알고 있는 것이 다 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로마 왕국이 무너지고 다시금 이태리가 통일이 되는 1870년까지 약 1400년 동안 도시국가들로 갈라져 외세의 영향하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 이태리 반도가 되겠다.

우리가 아는 동로마제국 즉 비잔티움 왕국은 사실 이탈리아의 역사이기보다는 그리스인들의 역사에 가까워 논외로 하고 이태리 반도 내로 한정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공화정이 무너져 로마의 초대 황제로 여겨지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즉위한 것이 BC27년이라고 한다.

그 후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기 313년에 밀라노칙령으로 가톨릭을 국교로 인정하고 330년에 수도를 콘스탄티노플 현재의 터기 이스탄불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동과 서의 로마로 나누어지게 된다.

현재의 터키에서 시작해서 스페인에 이르는 전 지중해에 걸쳐있는 거대한 제국을 모두 통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엔 서기 395년 로마는 동과 서로 나누어지게 되고 동로마는 그 후로도 1000년이 넘게 유지되며 아시아에 세력에 대한 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하며 유지되었지만 서로마는 100년도 못 간 서기 476년에 그 유명한 로마의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하여 멸망하게 된다.


사실 그 후의 이태리의 역사는 로마 이북과 나폴리를 포함한 시칠리아의 역사이며 남쪽은 거의 배제된 상태로 나아간다. 그래서 요즘 이태리의 남북 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상이함으로 인하여 분리독립의 이야기도 나오는 것인데 사실 로마의 원주민들은 지금의 레바논의 살던 베니키아인들 이 배를 타고 이주해 온 민족이라고 한다. 이들은 현재 나폴리 이남에 주로 거주하며 이에 비하여 북쪽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지금의 프랑스, 독일의 주요 민족인 프랑크족인 켈트 계열의 주민이라고 한다. 이처럼 인종 또한 복잡한 이태리 그 이태리는 5세기 이후 19세기까지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 로마교황령의 주요 도시국가로 나뉘어 로마를 무너트린 게르만 용병의 주 거주지였던 프랑크왕국들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어지럽게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

위 내용 정도만 이해해도 마키아벨리즘이 서구 유럽에서 후흑의 대명사로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데 비하여 동양 특히 극동지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라는 대혼란 속에서 이미 많은 정치철학가들이 등장하여 각각의 정치이념을 주장하며 승리를 위해서는 반간계를 사용해도 승리를 위해서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 문화까지 자리 잡았던데 비하여 아무래도 가톨릭이라는 종교정치적인 사상에 익숙한 서구 유럽인들에게는 간사하고 무자비한 주장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로마제국 멸망이래 1000년 넘게 혼란 속에서 고통받는 이태리 반도의 인민들을 생각하면 뛰어난 군주가 안정 속에서 나라는 다스려 인민들이 전쟁이나 환난으로 고통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태리를 생각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속 깊은 마음을 헤아려 본다면 좀 더 쉽게 이 책에 다가갈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제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로마의 상징 콜로세움

책의 첫 장에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책을 로렌초 데 메디치 전하에게 올리는 글로 시작한다.

피렌체 공화국의 주요 귀족이었던 메디치가(家) 우리에게는 르네상스시대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98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공화국의 공화정 하에서 군사와 외교를 담당하는 공직에 있었다. 당시 능력을 인정받아 고위직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하지만 1512년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군주 복귀로 인해 공직을 잃은 마키아벨리는 다시금 공직에 진출하기 위하여 노력했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집필한 것이 '군주론'이다.

하지만 원하던 공직 진출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등의 저술활동을 하다 1527년 병사하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우선 군주국의 종류와 권력의 획득 방법에 대하여 논한다.

고대 이후의 찬란한 역사를 가진 지중해의 여러 나라를 예를 드나 주로 세습군주국과 복합군주국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이어 신생 군주국이 어떻게 하여 생성되며 그 후의 예를 들면서 동양에서의 창업과 수성이라는 오래된 논의를 15세기 이태리의 마키아벨리 또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군주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무력 즉 군대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다루고 있는데 당시 이태리의 공화국들은 지중해 무역을 관장하여 부유하였기에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용병들이 이태리 공화국들의 국방을 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군주론'의 후반으로 가면 우리가 마키아벨리즘이라고 일컫는 겉과 속이 다른 후흑의 논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 장에서는 주로 군주의 처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악덕이 결과적으로 미덕이 될 수 있고 미덕이 악덕이 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정치권력의 세계에서 군주가 자신의 나라를 번영과 안녕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특히. 제15장 '사람들이, 특히 군주가 칭송받거나 비난받는 일들'에서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할 것을 권하며 맹자의 관점에서 보면 경악스러운 왕도보다는 패도의 가치를 높게 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장 '군주는 어디까지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에서는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기만책도 용인될 수 있다는 논조인데 플라톤의 '정치학'과 로마교황청의 종교정치적 명분에 익숙한 유럽인들에게 현재까지도 부정적인 것의 대명사로 불릴만하다는데 크게 이견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로 1000년 넘게 지속된 이태리 반도 내의 공화국들 간의 전쟁과 외세의 침략에 고통받는 인민들을 생각해 보면 뛰어난 군주가 조국을 통일로 이끌어 외세에 대항할 수 있는 국력을 길러 평화를 모색하는 마음은 애국자의 마음일 것이요 실제적으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공화제하에서 일했던 사람이었고 메디치 가문이라는 군주제로의 복귀로 자리를 잃은 것을 감안하면 그는 공화주의자였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의 후흑의 정치학이 마냥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인류 역사를 뒤돌아 보면 팍스로마나든 팍스 시니카, 팍스 아메리카든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힘에 의한 강제된 평화(?)가 인민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주었지 춘추전국시대든 환란의 이태리 반도든 고만고만한 국가들이 대립했던 시대는 제자백가들이 말했던 대로 말이 밭을 갈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죽어나가는 고통의 시대였던 점을 상기해 보면 혼란의 시대 강력한 군주제를 바탕으로 이태리 반도의 통일과 향후 공화제로의 복귀를 꿈꾸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야말로 진정한 휴머니스트가 아닌가 하는 나름의 질문을 던져보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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