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한 명을 꼽을 때 아마도 시인이자 소설가, 문학평론가, 출판업자, 국문학 연구자, 인문학자, 라디오 진행자, 대학교 강사, 인문학 강사 등등의 일을 했고 지금도 몇몇 일은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문인(文人) 장석주를 이야기한다면 큰 반론은 듣지 않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확신하는 바이다.
1955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난 장석주는 전형적인 전생(前生)의 기질을 타고난 천재였다.
계속되는 윤회 속에 그는 시시한 삶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던 듯하다.
이제 열반의 경지가 멀지 않았지만 순탄한 길에서 득도의 경지에 오르기보다는 현실적으로 권태의 길로 빠져들 공산이 크기에 죽은 전생의 장석주는 거친 길을 선택했던 거 같다.
그리하여 부모와 떨어져 시골에서 외조부 슬하에서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책 속으로 빠져들며 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는 태어난 재능과 책 속에 묻혀사는 열정 속에 이미 중학교 2학년 때 문학소년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인지 증오심인지는 모르겠으나(본인의 자서전이 없으니 무엇이든지 추측에 불과하리라) 사사건건 아버지와 대립하다 이네 학교조차 스스로 박차고 나온 것이 우리 나이로 열여덟 살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사회에서 중요하다던 최종학력이 경기상업고등학교 2년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 그는 4.5년을 시립도서관의 모든 책을 다 읽겠노라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스스로 닫힌 삶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마음을 다독여 준 것이 니체와 샤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계열의 작가였다고 한다.
그랬을 것이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 소개된 현대철학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철학이 실존주의였으니깐 말이다. 서양에서야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철학적 대립은 이제 저물어가고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주의로 통칭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자리를 잡아가지만 우리나라에 소개되기에는 시기 상조였다.
물론 헤겔 좌파부터 시작된 유물론적 철학은 우리나라에 발도 들여놓지 못했기에 청년 장석주는 실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찾은 그 시기 서울 시립도서관의 가장 혁명적인 책 들이었다.
그렇게 글을 깨우치고 책에 빠져 살던 장석주는 요즘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말처럼 모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1979년 바로 조선일보에는 시부분에 동아일보에는 평론 부분이 당선되었다.
때가 1979년이다. 상업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자가 조선과 동아일보 신춘문예 각기 다른 부분에 당선이 되었다. 고등학교 중퇴자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후 그는 대한민국 출판계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의 입지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호우시절이라고 했던가 좋은 시절은 1992년 故 마광수 교수와 함께 출판한 '즐거운 사라'가 외설 시비로 법정까지 가는 끝에 출판사 대표인 그는 작가와 함께 61일을 구속되어 살다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난다.
그러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안성으로 내려가게 된다.
정말 모든 것을 정리하였다. 출판사며 출판으로 산 강남의 5층짜리 빌딩이며 그간 사업차 진 빚이며 심지어 아내와 이혼까지 하며 철저히 혼자만의 고독 속으로 묻혀 버렸다고 한다.
아니 그것은 유년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이어온 지독한 고독 속의 사유의 자유가 보장된 원상태의 자신에게로 회유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후 그는 노자와 장자 그리고 해체주의 철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질 들뢰즈의 사유에 스스로를 침잠시키면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10여 년을 지내고 2002년 시집 '물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라는 시집으로 본격적인 문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10여 년이 지난 2021년 문인 장석주는 거의 도인(道人)의 경지에서 저서들을 쏟아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된 삶의 가치에 대하여 진정한 글을 쓰며 생활하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그의 엄청난 열정과 활동력에 비례하듯이 많은 글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특히 신문의 사설이나 기고문들을 보면 깜짝 놀랄만한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도끼로 머리를 치듯이 일순간에 아~ 하고 감탄사를 연신 날리게 된다.
칠순을 향해가는 처절한 사유꾼의 생각을 절제된 문자를 통해 읽고 감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시 한 편 소개하면서 작가 소개가 너무 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장석주 시인의 삶을 모르고 읽자니 그의 삶이 녹아있는 시(詩)의 진면목을 느낄 수 없는 안타까움에 말이 길어진 것 같았다.
아직 활발히 활동을 하시는 문인이기에 사실 그의 삶을 통해서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이 그저 글을 좋아하는 문외한 입장에서 건방진 일이겠지만 그래도 나름 정리해 보고 더 깊은 맛을 우려내고 싶은 마음이니 순수한 나만의 열정으로 너그러이 봐주었으면 한다.
그럼 그의 시 '대추 한 알'을 감상해 보자.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장석주 시집 <붉디붉은 호랑이> 中 애지, 2005
이 시가 발표된 해는 2005년이다. 그 정도 시기이면 시인 장석주가 세상의 풍파를 겪고 안성의 수졸재로 이름 지은 개인 서재로 가 자리를 잡은 지도 꽤 된 시기이다. 너무도 격정적이며 열정적이었던 삶은 지천명에 이르러 안정을 찾고 그의 사유는 무르익었던 시기이다.
그는 젊은 날의 실존주의의 영향 아래 노자와 장자의 무위적 삶과 해체주의라는 철학을 통해 기존의 사유의 틀을 옮아메는 거추장스러운 고정관념을 털어내는 일에 몰두하던 때이다.(물론 그가 가장 존경하는 니체의 사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관념 또는 관습의 타파가 좀 더 날카로운 지성으로 무르익은 것이 그들의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시인 장석주는 청년 시절부터 몰두하였던 본질을 넘는 실존자로서의 진정한 자유를 찾아 외유내강의 모습으로 진화하던 때라고 생각된다.
가을날 푸른 하늘 아래 푸르른 대추나무에 달린 빨간 대추 한 알.
그 대추 한 알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 대추 한 알이 열정으로 가득 찬 색깔인 붉어지기에는 태풍과 천둥 그리고 벼락의 시련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는 안타까운 짐작 그리고 대추 한 알이 둥글둥글 세상사 물 흘러가듯이 되기까지 무서리 맞고, 땡볕 밑에서 헐떡거리고, 어두운 하늘 아래서 외로움에 갇혀 지내온 지난한 날들이 있었으리라는 더 안타까운 짐작에까지 닿게 된다.
나무에 달린 대추 한 알도 그런 모진 시련을 이겨냈을진 데 하물며 인간은 삶은 말 할 것이 있겠는가?
빨갛고 둥그런 대추 한 알 같은 삶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을 것인가?
특히 실존자로서의 존재는 샤르트르가 지적했듯이 필연적으로 불안이라는 고통을 야기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태풍과 천둥 그리고 벼락 무서운 천재지변뿐만 아니라 무서리와 땡볕 그리고 어두운 하늘 밑에 고독 같은 일상적 기상조건마저 실존자 내부의 불안을 야기하는 현상의 단초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실존은 이런 자연스러운 자연현상마저도 무한한 불안의 고통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 나약함에 노출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대부분은 물 흐르듯 세상에 순응하며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시인 장석주는 경외에 찬 따뜻한 눈빛으로 모두를 응원하고 있다.
그저 짧고 쉬운 언어로 이어진 시(詩)이기에 쉽게 지나칠 수 있지만 그 속에는 실존하는 인간들의 숙명인 불안의 고통으로부터 의연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강인함에 박수와 응원을 보내는 시인 장석주의 따뜻한 마음이 있는 시 '대추 한 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