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가적일상추구 Dec 12. 2021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난 45년 여간 얼마나 좋아졌을까?

인간을 정의할 때 쓰이는 말들이 참으로 많다.

대표적인 것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유명하다. 대표적인 만큼 공감도 쉽게 된다.

사람(人)은 사회 안에서 존재하고 인식함으로써 인간(人間)이 된다.

그저 자연 속에 홀론 존재하는 단독자로서는 인간이라는 표현보다 그저 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TV 프로그램에서 자연 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을 '자연인'이라 표현하지 '자연인간'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인간에 대한 정의를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특정한 장소에서 홀로 살아가기를 선언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우리는 인간들의 구체적 집합체인 사회에 속해서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사회 안에서의 사람의 존재는 자연 상태의 단독자와 같이 누구나 평등하다고 배웠고 또 그리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음은 누구나 아는 뼈저리는 사실이다. 인식론적으로 인간의 존재는 누구나 평등할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 조건으로 똑같은 상태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의 부모가 인간 사회에서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불평등적 조건으로 태어나게 된다. 인간은 조건 지어질 수 없다는 근현대 철학자의 피 말리는 고뇌와 피 터지는 절규가 있음에도 태어나는 순간 그가 들고 있다는 '수저'로 등급이 갈리며 출발 라인의 앞뒤가 가늠하기 힘들 만큼 서로 멀어지며 달리는 수단조차 같을 수가 없는 말도 안 되는 경쟁에 뛰어들어 만 20살이 되기도 전에 대입시험 결과로 또다시 삶의 등급 결정에 결정적인 등급표를 손에 쥐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사회적 조건에 두 손들고 살아가려 해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의 최종학력, 연간 수입, 재산 보유 현황, 사는 곳, 자식들의 위치 등등등 모두가 서열로 줄 세워지며 그 속에서 인식하는 자신의 모습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이라는 감정에 찌들어 죽어갈 즈음 어느새 나의 자식 또한 99.9999% 나와 같은 모습으로 늙어감을 인식하고 눈을 감는다.

이런 불평등은 분명 부조리이다. 하지만 이 부조리의 역사는 호모사피엔스가 집단생활을 영위하며 보다 나은 삶이 가능해지고 일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잉여인간이 등장하면서 시작된 이래 2021년 12월에도 더욱 악화일로로 나아가는 중이다.


그 부조리한 불평등의 인류 역사 속에서도 가장 큰 스케일이었던 산업사회 초기 대량 생산하에 저임금 고노동에 시달리던 우리네 이야기가 바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다. 책이 나온 후로 이미 45년이 지난 지금 과연 작가 조세희가 불평등의 인간 사회에 약(藥)이 될 것으로 말했던 사랑으로 가득한 따뜻한 사회가 되었을까? 그 불평등의 역사에서 대한민국 현대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깊은 각성을 할 수 있는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으며 그 암울했던 1970년대로의 우울한 여행을 떠나보자.            

우선 이 소설은 소설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하나의 장편소설이 아니고 여러 개의 중. 단편 소설이 서로 연관성을 지닌 연작 소설집이라는 것이다.

'난장이'로 상징되는 근대 우리 사회의 소외된 도시빈민인 김불이와 그의 큰 아들이면서 배우지 못하고 산업역군이라는 미명(美名) 하에 착취당하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하에 자유를 꿈꾸는 현대의 소외된 도시빈민 김영호를 주축으로 전개된다.

난쟁이 김불이의 아내와 김불이의 자식이자 김영호의 두 동생, 유린된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지식인 지섭, 대를 이어 산업자본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재벌 3세 경호, 법률가 아버지를 두고 높은 수준의 경제적인 삶을 누리는 고위 공무원의 아들 윤섭, 지식인이나 노동자 편에선 노동자 교회의 목사와 과학자로 불리는 작은 공업사의 사장 등의 인물이 등장하여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분적 갈등이 소설집의 주된 내용이다.


12편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입장에서 전개되기에 줄거리라고 소개하기가 좀 모호하다.

하지만 그 내용을 정리하자면 서울의 재개발 예정지 철거지역에 거주 중인 난쟁이 김불이. 그는 조상 대대로 노비 출신으로 키가 117센티미터에 몸무게 32킬로그램으로 '난장이'로 불린다.

근대화되어가는 나라에서 노비로서의 자리를 잃은 그는 채권 매매, 칼 갈이, 고층 건물 유리 닦기, 펌프 설치, 수도 고치기 등의 일을 하며 산업화. 근대화되어가는 이 땅에서 소외되어 간다. 그러나 외형과는 달리 사랑으로 충만한 이상 사회를 꿈꾸며 아내와 아들 둘 그리고 막내딸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던 중 그들의 집이 재개발이 되고 아파트에 들어갈 중도금이 없어 입주권을 전매하고 집세가 싸고 가내수공 공장이 많은 성남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주 과정에서 철거 단원의 폭력에 시달리고 수도 고치는 일도 경쟁업자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아들이 다니는 공장의 굴뚝에서 소망하던 화성으로의 이주를 꿈꾸며 투신자살을 한다.


그 후 가족은 은강그룹의 섬유, 화학, 자동차, 전자 공장 등이 있는 도시로 이주하고 산업자본가에 의한 착취에 시달리게 된다. 열악한 의식주에 하루 10시간의 주야 교대 노동에 시달리나 저축은 고사하고 매달 생활비조차 빠듯한 생활에 큰아들 영호는 절망한다. 절망 속에서도 사랑으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노동운동에 투신하나 현실은 더 큰 절망만을 느끼게 될 뿐이다.

이에 자본가를 살해하겠다는 절망 속에서 파멸의 선택을 한 후 서울의 은강그룹 본사에 잠입 사장과 얼굴이 비슷한 그의 동생을 살해하고 체포되어 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극으로 점철되는 삶을 산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은강그룹의 재벌 3세 경호의 부르주아적 현실 인식 또한 프롤레타리아들의 인식만큼 극단적이다. 노동자들을 자본 생산의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하며 인간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된다는 결정론적 존재론으로 세상을 삐뚤어지게 보는데 이는 두 계층 간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며 서로 간에 이상과 현실의 괴리만 생기는 당시 사회에 대한 예리한 지적을 하고 있다.

60년대인지 70년대인지 가내 수공 공장이 늘어선 모습

특히, 이 소설집이 단순히 현실에 대한 르포식 이야기 전개를 넘어서 인간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넘치는 찬사를 받는 부분은 바로 첫 번째 이야기 '뫼비우스의 띠'와 열 번째 이야기인 '클라인씨의 병'에 있다고 할 것이다. 

안과 겉의 구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내부와 외부의 구별이 따로 없는 '클라인씨의 병'으로 상징되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나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계에서는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을 통해 우리의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많은 부조리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완벽하게 상징한다.

노동자들은 노동자 나름의 공정한 분배를 자본가는 자본가 나름의 자본과 기술 그리고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기업을 운영하는 만큼 더 많이 가져도 된다는 확고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한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씨의 병'처럼 서로가 현실에는 없는 이상향만을 추구하게 되며 그 갈등은 끝없이 반복되고 말 것이라는 암울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생긴다.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이같이 이 소설이 쓰인 때가 1970년대 중반인 것을 고려했을 때 이미 45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는데 주인공 난장이 김불이와 그의 아들 김영호가 꿈꾸었던 그 부조리를 사랑으로 극복하는 세상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누구나 알겠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하나 '아니 올 시오'이다.

물론 당시에 비하면 비인간적인 노동은 분명히 개선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공정한 분배의 문제라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고 누구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재의 우리 사회 담론이 '양극화'이며 이런 문제는 지난 45년간 더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과거 우리 사회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처럼 산업자본가와 노동자들의 간의 이분적 대립이 성립했다면 현재는 신자유주의 사회하에서 우리의 갈등적 요소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질적인 사회 간 갈등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계층과 조직 간의 다자 대립적인 갈등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50대 이상의 기득권 계층과 2030으로 대표되는 저성장 사회 속에서 비정규직이나 도시 주거 소외계층으로 살아가는 젊은 층의 대립, 같은 직장 내에서 같은 세대라 하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 소위 귀족노조라 칭하는 대기업의 강성노조와 그 기업의 파견직들과의 갈등 등 과거에는 같은 집단이나 세대라 해도 지금의 사회에서는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계층으로 저마다의 정의와 공정을 말하며 대립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이 그저 우리의 기성세대가 잘못했다. 아니면 젊은 세대가 나약해서 그렇다는 둥의 극단적인 논리를 가져다 반목하기엔 우리 모두가 한배를 탄 같은 선원들끼리 풍파를 만나서 어려움을 극복하기보단 비바람 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저 신자유주의 체계하에서 최상위 소수의 권력자인 거대 금융자본이 자취를 감춘 채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세계를 움직이는 마당에 사실 산업자본가들도 어쩌면 그들의 착취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의 세계 정치 헤게모니를 가르쳐 '팍스아메리카나'라고 한다.

미국의 '팍스아메리카나'의 중심에는 금권력(金勸力)을 쥐고 있는 거대 금융자본가들이 있고 그들은 FRB(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통해서 세계 기축통화라 할 수 있는 달러 공급을 조절하고 달러 공급에 대한 대가로 미국 정부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이자를 받고 있다고 하니 전 세계가 그들에 의하여 착취당한다고 말해도 전혀 근거가 없는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정부는 물론이고 전 세계 모든 국가와 기업 그리고 대다수의 가계와 개인이 금융기관으로부터 차입을 안 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림잡아 생각해도 가능한 것이 모든 채무자는 채권자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우울한 짐작만이 가능한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산업자본가와 노동세력 간의 피나는 대립의 역사는 어쩌면 거대 금융자본가들의 관점에서 볼 땐 그것 또한 하나의 밥그릇 싸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도달한 나의 관점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대립과 갈등 역시 신자유주의 시대, 철학적 담론으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볼 때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세력 간의 갈등 중 하나였는데 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인 노동자 계급(특히 저학력 비숙련의 저임금 노동자)에서 봤을 때 너무도 가혹한 현실에 대한 처절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60.70년대 공단과 그 공장에서 열악한 상황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

이제 정리하자면 이렇다.

인류가 집단생활을 하고 그 생활이 나아져 노동력이 없는 계층도 부양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되었다.

다행히 인류는 당연하게도 인간미 넘치는 이들이었다. 아이들이야 미래를 위해 마땅히 보살펴야 하지만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까지 부양을 했던 것이다.

그들로부터 문화가 나오고 혈연집단이 종족 집단으로 그리고 사회로 발전되어가며 잉여인간을 양상 했다.

이 잉여인간들은 인간 사회에 계층을 만들어 기어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그 피라미드로 없애려 고민하고 혁명을 일으키고 전쟁을 수도 없이 하고 결국엔 나라를 만들었다.

하지만 수십만 년 해오던 버릇을 한순간에 고칠 수가 있겠는가?

피라미드의 꼭대기는 늘 존재했고 다시금 진정한 혁명을 부르짖는 자들은 시베리아의 차가운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현대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이런 행동에 아연질색하며 두 손 다 들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에 이기적이며 대립적이라는 결론에 점점 다다르고 있다.


그 와중에 서구 자본주의는 이미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좌를 더욱 공고히 하며 차츰 시대의 담론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움직인다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엘런 머스크 등등등 사실 그들도 거대 금융자본가는 아니다. 그저 세상에 혁신을 가져온 산업자본가의 후예일 뿐이다.

어쩌면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산업자본가와 노동 계급의 투쟁도 서로 간에 밥그릇 싸움 일 분이다.

진정으로 모든 것을 가진 이들은 산업자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100년 기업은 고사하고 30년간 상장을 유지해도 대단한 세상이 된 지 오래다.

기업이 망하면 노동자도 함께 추락한다.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이라는 인물이 대표적이지 않은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경훈이 하던 '기업이 망하면 노동자 역시 밥그릇을 놓치게 된다'라는 그 고민이 현실이 된 지 이미 오래전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전에 과도기라는 사회주의를 통틀어 근대를 넘어 현대까지 인류의 담론은 '자유와 평등'이었다.

그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의식주에 있어서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 있어야 한다.

산업혁명 시기에 비하면 '자유와 평등'을 위한 의식주의 개선은 눈이 부실만큼 개선되었다.

하지만 하루 8시간 주(週) 최대 52시간의 노동만을 하고 배고프지 않고 잠 안자 가며 일하지 않는 시대에 자유(오로지 여가의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평등이라고 하면 당시보다 더 심해졌을 것이다.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이 고된 노동후 창문도 없는 고시원 한 평 공간에 누워 18세기 영국의 공장노동자와 다름없는 오로지 노동만을 위한 의식주를 해결을 하고 있으며 준비되지 못한 노년은 쪽방에서 연명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다른 한편에선 자본가야 말 것도 없고 고소득 전문직, 부동산 등의 자산으로부터 얻는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자산가 등 상위 20%의 사람들이 전체 부의 60% 이상을 가지고 현대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삶을 누리고 있다. 한마디로 불평등한 세상이라는 부조리는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세호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불평등한 세상에 대안적 사유인 '사랑'이 본바탕이 되는 세상에서 서로가 배려하며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난장이'뿐만이 아니라 예수, 석가모니, 마호메트, 공자와 묵자(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들 사상의 바탕은 애(愛)이었다) 등등등 이른바 성인(聖人)이라고 칭하는 위대한 이들도 이기심보단 사랑으로 사람의 세상을 밝히자고 누누이 이야기했던 바이다.

하지만 그들이 다녀간 지도 최대치로 약 2,500년이 흘렀지만 별반 변한 것이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래도 우리는 불평등 해소를 위하여 노력하여 인간다운 삶의 더 많은 누림을 사랑이라는 인간이 가진 가장 그 위대한 정신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70년대 산업화 초기 우리 사회 소외된 노동자 계급에 대한 관심과 사랑 그리고 현실 개선을 위해 치열한 시대정신으로 글을 썼던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다시금 읽음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했고 또 어떻게 나아 갔으면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소월- 가는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