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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Dec 27. 2021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우리 현대사 그 고통의 역사에서 상처 받은 영혼의 큰 울림

신동엽 시인은 1930년 8월 18일 충청남도 부여읍에서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으나 농사와 사법 사서로 생계를 이었던 그의 아버지 신연순은 어린 아들 신동엽이 글재주가 남다른 것을 알고 붓과 책을 마련하여 학업에 힘쓰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 아들은 숙식과 학비가 지원되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해방 후 남과 북으로 갈려 껍데기뿐인 이념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무정부주의라고 하는 아나키즘에 빠지게 된다.

해방 후 북쪽에 들어선 소비에트공화국의 하위 정부뿐만이 아니라 남쪽에 들어선 정부도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국가의 총알받이 국가로 전락하여 친일을 청산하지 못하고 약속했던 토지개혁조차 실시하지 않자 그놈이 그놈인 기회주의자만이 판치는 껍데기 천국으로 전락한 조국의 현실에 항거하다 퇴학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고 이미 허울뿐인 이념보단 민족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무정부주의적 국가를 원했던 그는 육체와 정신 모두가 괴로운 가혹한 현실로 내몰리고 있었다.

고향 땅에서 맞이한 6.25 몰려온 인민군은 당시 지식인이었던 그에게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일을 맡겼지만 남과 북 모두 허울뿐인 이념을 내세운 권력에 눈먼 기회주의자들의 소굴이었기에 애초 일하고자 하는 아무런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1950년 12월 남한 정부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자 지금의 민방위 격인 국민방위군을 징집하게 되고 신동엽 시인은 여기에 징집된다.

이듬해 4월 30일 해제되어 부산에서 고향인 부여까지 도보로 이동하게 된다. 전쟁통에 먹을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개천에서 잡아먹은 게가 말썽이었다. 그 해 걸린 간디스토마는 평생을 그의 육체를 괴롭혔다. 결국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될 때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살아야 했다.


이쯤 되면 최인훈의 '광장'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이명준'이 떠오른다.

해방 후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명준은 애당초 이념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북조선의 공산당 고위 간부라는 이유로 일제 고등경찰이었던 남한 경찰들에게 고문을 당하게 된다(이는 약산 김원봉 선생이 맞이한 상황과 흡사하다). 상관도 없는 이념에 조건 지어진 것들 때문에 고통받던 그는 아버지가 있는 북으로 월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이념을 위한 투쟁도 결국 남쪽처럼 권력을 위한 개개인들의 욕망에 대한 투쟁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펼쳐진'광장'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광장 대신 밀실을 선택하려는데 그 밀실엔 침묵에 대한 보상으로 응당히 사랑이 있어야 했다.

남쪽에 여인은 더 조건이 좋은 그의 친구와 함께하고, 사랑이라 여겼던 북쪽의 여인은 전쟁 통에 그의 아이를 가친 채 죽고 만다. 전쟁이 끝나고 남쪽에 전쟁 포로였던 이명준은 이념을 뿌리치고 중립국으로 가는 배를 선택했다. 그러나 중립국 인도로 가는 배 안에서 또다시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장에 대한 염증이 밀려오고 밀실로의 침잠도 허락되지 않는 운명의 이명준은 바다로의 투신을 선택하며 짧은 생을 마감 지었다.


하지만 시인 신동엽에게 그 힘든 몸과 마음을 이끌고 살아갈 힘을 주는 이가 있었으니 그의 아내 인병선 여사였다. 소설 '광장'의 이명준과 같은 동시대의 지식인으로 남과 북의 이념과는 다른 생각으로 살고 고통받았으나 그에게 삶은 사랑으로 빛날 수 있었으리라.(사실 인병선 여사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공산주의에 투신한 인물로 공산주의 운동과 전향을 일제와 해방 후 남에서 두 번이나 한끝에 한국전쟁 시절  월북한 공산주의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를 다시금 광장으로 불러내어 인민의 행복을 위한 정의(正義)를 외치게 만들었다. 이 땅에서 우리만의 힘으로 만든 자유와 평등의 삶을 꿈꾸었던 진정한 애민(愛民) 주의자였던 그였다.

그런 시인 신동엽. 그의 대표 시 '껍데기는 가라'를 감상해 보자.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52인 시집' 中 1967년


시인 신동엽이 꿈꾸었던 것은 진정한 '민족자주통일' 이었을 것이다. 4.19혁명

시는 처음부터 '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친다.

여기서 의미하는 4월은 1960년 4.19혁명을 가리킨다. 인병선 여사의 말에 따르면 살아생전 신동엽 선생은 1960년 4.19를 즈음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아침이면 나아가 저녁나절 흙이 잔뜩 묻은 신발로 돌아 오곤 했다고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일제에 부역하던 친일파들이 그들의 든든한 뒷백을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꾸어 민중의 피와 살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껍데기에 지나기 않았던 조국. 그런 조국의 현실 앞에서 애민주의자 신동엽은 1960년 4월의 항거는 새로운 희망으로 가슴 떨리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런 민족적 희망과는 달리 이듬해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는 기약 없는 어둠의 구렁으로 빠지고 만다.

이후 이어진 더 가혹했던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에 대한 처참한 탄압으로 물든 조국의 비극을 그가 직접 목도하였다면 어떠했을까?


시(詩)는 그가 어린 시절 이야기 들었던 동학년 농민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또한 민중이 자유로이 살고자 하는 고귀한 정신의 외침만 남고 그것을 이용하여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던 소위 집권층이라 하던 이들과 지식인이라고 존경받던 껍데기들의 간사한 마음을 가라고 외친다.

구한말 탐관오리 조병갑의 횡포에 못 살겠다고 봉기한 농민들을 이용하여 청나라와 일제를 등에 업고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을 채우겠다고 이 땅에 외국 군대를 들여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인민들이 우금치에서 듣도 보지도 못한 일본 군대의 개틀링 기관총에 산화하게 만들었던가? 시인은 이념을 들고 인민을 죽음으로 내몰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지배계급과 지식인들은 껍데기라 칭하며 사라질 것을 요구한다.


3연으로 접에든 시(詩)는 역사적 배경을 삼국시대로 엎고 올라가 백제의 석공 기술자로 신라의 불국사에서 석가탑을 만들기 위해 경주로 온 지아비 아사달을 기다리다 지쳐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던 아사녀의 전설을 이야기하며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역사 앞에 그 어떤 부끄러움 없이 하나가 될 것을 목놓아 부르짖는다.

진정한 저항시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 어떤 이념의 허물이 없는 중립의 초례청(혼례를 담당하는 관청)에서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는 아사달과 아사녀가',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란 표현으로 민족의 구성원 그 누구의 욕망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하길 기원하는 표현이 시(詩) 적일뿐만 아니라 간절한 저항의 힘이 절로 느껴지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 연에서 다시금 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치는데 한라에서 백두까지 우리 영토의 모든 껍데기는 가고 '향그러운 흙가슴'으로 표현되는 맑고 순수한 민족적 민주주의만 남기를 바란다.

또한 '쇠붙이'로 상징되는 그 모든 욕망에 찌든 가식과 기만의 폭력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을 소망하며 시는 마무리된다.


이 시를 처음으로 접했던 것이 1993.4년 즈음 수능을 준비하던 고등학교 때이다.

그땐 그 '껍데기'들의 봉건적. 반민주적. 반민족주의적 만행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저 "껍데기'와 '향그러운 흙가슴'의 대립적인 이미지를 통해 정의를 갈구하는 초감각적인 시로 받아들 수밖에 없었고 가르쳤던 교사들도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앞서 살펴본 혼돈의 시대에 이념의 틈바구니 속에 고통받은 한 지식인 개인의 역사는 뒤로하고 그저 당시의 작은 물질적 풍요와 개인의 자유가 존재하는 세상이 된 것은 그와 같이 정의를 외치던 선구자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세상으로 어떻게 보면 그 시절의 사회가 상당히 정의로워진 시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프로파간다적인 의미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도록 강요된 고달픈 수험생의 삶에서 이루어진 이 위대한 시와의 앙상한 감수성의 만남이었는가 싶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머리가 커져 감에 알게 된 세상은 아직도 껍데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나 같은 무지몽매한 3차원의 세계에 사는 인민은 전혀 그릴 수 없는 비틀어진 형이상학의 부조리한 것이 재림한 세계라는 것에 확실한 믿음이 간다.

이것이 비단 작금의 현실뿐만 아니라 문맹의 시대로부터 내려온 우리 인류의 비극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마냥 아려온다.

역사 이래 진정으로 정의가 승리한 적이 있었는가?

승리했다고 해도 그 마음으로 몇 백 년 다스려진 적이 있었던가?

욕망으로 일그러진 역사 앞에 몸과 마음으로 절망했던 양심적인 지식인의 외침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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