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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Feb 03. 2022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파스테르나크, 안톤 체호프, 솔제니친, 푸시킨 등등 러시아 고전문학은 유명하지만 사실 긴 주인공의 이름은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 있지만 최소 500페이지짜리 두 권 이상의 분량의  압박은 소설의 접근을 차단하는 바리케이드 같아 쉽게 책을 손에 쥘 수 없는 선입견이랄까? 아님 두려움이나 겁이랄까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던 중 큰 맘먹고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다.

이보다 더 두꺼운 책은 얼마든지 많이 읽었지만(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총 30권을 이문열 편작으로 불과 며칠 만에 읽은 것에 비하면 왜 그리 러시아 고전은 손에 안 잡히는 모르겠다. 사실 이 책들은 그냥 재미있다. 딱히 무얼 위해서 읽는다기 보다 그냥 재미 그 자체로도 충분히 시간 내어 읽을 가치가 있다.) 러시아 고전하면 내가 보기에 인간 개인의 삶 자체와 신과 국가 사이의 부조리 그리고 그 부조리 극복을 위한 사랑의 의미라는 거창한 무언가가 독사처럼 도사리고 있는데 그걸 보지 못하고 이내 물리어 몸 져 눕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 고전들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사실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럼 이 책 '죄와 벌'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먼저 책을 읽기 전에 나름 맹세한 것이 있다. 꼭 무언가를 얻고 배워야 한다는 기존의 나만의 선입견을 버리고 편히 대중소설 읽는 기분으로 접근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상(上) 권은 꽤 소설적인 재미가 있었다.

남들은 지루하다고 하는데 빠른 사건의 전개와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의 내면의 이야기는 소설적 재미가 충분하였다.

중간중간 1800년대 중후반 러시아 사회에 유행한 허무주의, 공산주의적 이상주의, 낭만주의 같은 당시로는 진보적인 사상들을 만나는 즐거움 또한 쏠쏠하였다.

그리고 하(下) 권은 이야기가 종말로 다다르면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긍정적 내면의 변화는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 그 자체였다.


이 소설의 기본 플롯은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곤궁한 처지를 비관하며 악덕 사채업자(일을 마치고 일찍 귀가한 그녀의 여동생 리자 베따까지 살해한다)를 살해하고 돈을 훔치며 방황하다 결국 사랑과 신 앞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새삶을 찾는다는 다분히 개과천선적인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내내 편히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파악하게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라스콜리니코프와 대척점에 있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파멸과 라스콜리니코프의 구원이라는 명확한 구분이 소설을 다 읽고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마음을 자연스레 읽을 수 있는 아주 친절한 소설이라는 것이고 그게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함이 아닌가 싶었다.


죄? 죄는 누구나 다 저지를 수 있다.

주인공의 동생인 두냐나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소냐 또한 죄인 들이다.

다만 그 죄의 대상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 달라 타인들이 가하는 벌을 면제받을 받을 뿐이다.  사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 기만이라는 죄를 짓고 있고 자기 자신이 내리는 나름의 형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전 소설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삶의 부조리이다.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살해하는 주인공 로쟈

이 부조리한 삶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에 대한 대답을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신(神)의 자비와 인간의 사랑으로 말한다.

어쩌면 이 뻔한 대답을 위해 그 많은 분량의 소설을 썼을까 싶지만 사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다 배운다. 하지만 욕망이라는 우리를 무한궤도에서 달리게 하는 미친 힘이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그 혼란을 극복할 힘으로 예수의 사랑 실천이라는 이제는 우리에게 헛구역질 나는 가치(?) 되어버렸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그것을 설파하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라스콜로리니코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 모두 사람을 죽이거나 죽게 만든 장본인이지만 각자 자신을 용서하거나 그와 비슷하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명분을 준 절연적 인간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비범인'이라는 무지한 대중을 이끌 수 있는 능력자라는 이유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오로지 자신의 정욕만을 위해 타인의 삶은 안중에도 없는 이기주의자이자 허무주의자로 모두 다른 사람과 단절된 체 자신의 생각으로만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라스콜로니코프의 곁엔 사랑하는 하는 어머니와 여동생 두냐 그리고 믿고 지지하는 친구 라주미힌 마지막으로 그를 사랑하는 소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랑으로 라스콜로니코프의 절연을 벗겨주었지만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늘 그 옆에는 누군가가 있었지만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던 그들은 스비드리가일로프를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또 다른 목적이었기에 양자 수단화된 인간관계 속에서 절연을 벗겨주기는커녕 오히여 그 절연체를 더욱 두껍게 만들어주었기에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살이라는 극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생각나는 소설 하나 있는데 바로 절연적 인간의 표상이었던 뫼르소가 주인공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다.

'죄와 벌'이 사랑의 인간관계 속에서 절연을 극복하고 계획성 살인치고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인 8년의 유배형을 받은 로쟈의 이야기라면 그 절연을 극복하지 못하고 삶의 부조리 속에서 타인의 이해를 바라지도 않아 우발적 살인으로 사형까지 받는 뫼르소 이야기가 바로 '이방인'이다.

두 소설을 대척점에 놓고 비교하는 순간 머릿속에 마치 섬광 같은 것이 스치는 기분이었고 아 이것이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구나 싶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소설 읽듯 읽었지만 결국 고전은 스스로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힘이 있어 고전이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나게 했던 책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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