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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Jul 19. 2022

천상병- 귀천(歸天), 행복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마음으로 살아보자

시인 천상병 하면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언어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활적인 측면에서 기인(奇人)과도 같은 성격과 냉전시대 군사정권이라는 그가 맞닥뜨린 시대적 상황에 맞물려 힘든 삶을 살았던 불운의 시인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조차도 긍정의 마음으로 극복하고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시를 남겨준 위대한 시인 천상병의 대표 시 귀천(歸天)을 감상해 보자.


귀천(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창작과 비평' 70년 6월 호




1930년 1월 29일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경상남도 마산을 연고를 둔 조선인 부모 밑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거의 일본에서 보내고 1945년 해방을 맞아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마산중학교 2학년에 편입을 했다. 당시 마산. 통영 등은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고 활발히 활동하였던 때이다. 유치환과 김춘수 같은 서정 시인, 시조시인 김상옥 그리고 고향은 이북이지만 그 누구보다 통영을 사랑했던 시인 백석 등이 경상남도 통영과 마산 등에서 문학 창작 및 정착해서 살던 곳이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시인 천상병의 마산중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무려 유치환 시인이었다.

그리고 유치환의 부인이 유치원 시절 보모였으며 그의 결혼식 화동이었던 김춘수 시인의 지도와 추천 등으로 이미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전국구 천재 문학소년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였다.


그리고 6.25가 한창이던 1950년에는 미군의 통역관으로 근무를 하고 1951년에는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는 등 전쟁 중에도 남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쯤 되면 나이는 두 살 아래이고 서울대 경제학과는 1년 선배였던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노미네이트 작품 '순교자'의 저자인 김은국 작가가 떠오르는데 미군의 통역장교로 근무했고 서울대 경제학과 1년 선후배로 거의 비슷한 이력으로 전쟁 후 미국으로 도미하여 서울대에서 영문학 교수로까지 근무했던 김은국과 천상병 시인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의 성격적인 부분에서 좀 더 나은 삶과 많은 작품 활동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1967년 7월에 있었던 동백림 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당해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막걸리를 주식으로 삼았던 천상병 시인 결국 간경화로 목숨을 잃었다.

행복

- 천상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예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난데없이 시인의 다른 시 '행복'을 소개하는 것은 그의 낙천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시(詩) 중 이 시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긍정하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며 노래하는 천상병 시인.


그런 시인에게도 커다란 시련이 닥쳤으니 바로 1967년 7월 터진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다.

동백림 하면 동백나무가 울창한 섬을 떠올릴 것 같지만 아마도 중국에서 베를린을 발음 나는 대로 한자로 쓰고 그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백림인가 보다 그럼 동백림은 동베를린이 되는 것이다.

이 동백림 사건은 군사정권 시절 문화 예술계의 윤이상, 이응로 등 194명이 대남 적화통일을 노리고 동베를린에 있는 동독 주재 북학 대사관을 넘나들며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투옥된 일이었다.

이때 194명 중의 한 명이자 천상병 시인의 친구 강빈구에게 술값으로 1,000원, 500원씩 받아내곤(강빈구뿐만이 아니라 시인 천상병은 자신이 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술값을 받아냈다고 한다) 했는데 그 돈이 36,500원이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천상병 시인은 빨갱이에게 돈을 갈취한 사람이 되어 정보기관에서 3개월, 투옥되어 3개월간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이가 거의 다 빠지고, 말을 더듬으며,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결정적으로 그 자유로운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덧대진 것이었다.

사람이 마냥 불행해질 수만은 없는 것인지 그때 그를 간호했던 친구의 여동생 문순옥여사를 만나게 되는데 둘은 결혼을 하게 되고 문순옥여사는 인사동에서 찻집을 운영하며 천상병 시인을 부양했는데 그 찻집 이름이 바로 '귀천'이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천상병 시인은 1993년 63세를 일기로 의정부 자택에서 지병인 간경화가 악화되어 숨졌다.

짧게 쓴다고 쓴 천상병 시인의 삶이었지만 사실 이보다 몇 배는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사람이 천상병 시인이다.

오늘은 그의 대표 시 '귀천'을 소개했는데, 워낙에 쉽고 간결한 시(詩)이기에 따로 설명은 안 하겠다.

하지만 그의 그 천재성과 시대를 잘못 타고 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삶을 살았음에도 누구도 원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은 참으로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들 일임은 누가 봐도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그 후 민주화운동이라도 해서 그 한(恨)을 좀 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지만 그 후의 시인의 시를 보고 있노라면 마냥 천진한 낙천을 풀고 있기에 그 한없이 넓은 마음을 헤아리기엔 나 자신의 모자람만을 느낄 뿐이다.

삶이 힘들다고 느낄 때 천상병 시인의 시를 읽으며 안분지족(安分知足)의 마음으로 차분히 일상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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