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게 안녕이라고 인사 할 수 있는 담대함
프랑수아즈 사강이 소르본 대학 1학년 시절 그러니깐 우리나라 나이로 스물 소위 말하는 만 나이로 열여덟 살에 발표한 첫 작품이자 대표작인 '슬픔이여 안녕'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십하고도 절반을 살아온 내가 자식뻘인 열여덟 소녀가 쓴 소설에 대하여 과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생각해 보면 아득히 멀다고 느끼고는 그들의 나이가 이천 살은 된 것처럼 여겨지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나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의 글도 따지고 보면 내 나이 정도 되는 사람들의 생각인데 그 텍스트의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나이가 한참 어린 소녀가 쓴 글이라서 그런지 대략 소설의 줄거리 정도는 파악되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나이가 무슨 대수냐는 자조적인 생각을 하며 잘 읽어내긴 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이 나이 먹도록 난 대체 무엇을 했는지 하는 쓴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명작이긴 하다.
짧은 머리에 이지적인 외모 그리고 유독 불붙인 담배를 손가락에 끼고 있는 사진이 많은 프랑수아즈 사강은 1935년 프랑수아즈 쿠아레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사강이라는 성(姓)은 그녀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인물인 '사강'에서 따온 것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할 때 '쿠아레'라는 가족의 성을 가지고는 활동하지 말라는 것을 받아들여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만 여덟 살인 1954년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하고 바로 '사강 신드롬'이라고 불릴 만한 반향을 일으키며 성공적인 문인 생활을 하였지만 사생활적으로는 그 작품의 주인공 세실의 그 후의 이야기라고 여겨질 만큼 질곡이 많았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은 차치하고서라도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할 뻔했던 교통사고의 원인이었던 스피드에 광적으로 몰입하여 각종 스포츠카를 섭렵하고 약물과 마약중독뿐만 아니라 도박에까지 손대는 등 자유분방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다.
그 와중에도 작품 활동에는 성실히 임하여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 시나리오, 에세이, 시등 다양한 창작활동을 하여 20편의 장편소설과 3편의 단편소설집 등을 남겼다.
이제 작품 이야기로 돌아와서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감성에 충실한 사람들이 대다수인 인간 사회에서 이성적인 인간이 소외되어지는 과정을 그린 무언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만 작가가 살아생전 그런 철학적 관점에서 이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는 않았고 그보다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한 부분에서 그 의미를 찾아 과거로 되돌아가 이 소녀 시절의 소설을 통해 그저 인간은 저 고상한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보다 현실적으로 감각되어 인지되는 현상학적 세계에 더 몰입하여도 죄가 될 수 없다는 아직은 실존주의적 단계에 있는 소설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대체 이 소설의 내용이 무엇이고 그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1953년(1954년 발표작으로 개인적으로 시간을 그보다 1년 전으로 설정했다) 여름 그러니깐 우리나라는 막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 파리의 마흔 살 먹은 홀아비 레몽과 10년을 수녀원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있다 2년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열일곱의 딸 세실은 아버지의 애인인 반쯤은 유흥업계, 반쯤은 사교계에 속한 스물아홉 살 엘자와 함께 프로방스 지역이라 불리는 프랑스 동남부 해안으로 두 달 정도의 바캉스를 떠난다.(70여 년이 흐른 지금의 우리나라는 두 달이 아니라 일주일 여름휴가조차 이 눈치 저 눈치 있는 눈치 없는 눈치 다보는 마당에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 건 비단 나뿐 만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모두 고매한 도덕적 관념과 지적인 교향을 갖춘 사람들이라고 말하기엔 레몽의 평소 취향과 엘자의 직업 그리고 자유분방하기 그지없는 철없는 딸 세실까지 따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거기에 두 명의 사람이 끼어들게 되었으니 세실과 연애를 하게 되는 이십 대 초반의 매력적인 법대생 시릴과 죽은 세실의 어머니의 친구이자 디자이너인 안이 1953년 여름 뜨거운 태양만큼 숨 막히는 이야기를 펴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들중 안을 제외한 모두가 앞서 말한 대로 지성을 갖추었다고 표현될 수 있는 이성적인 인간이라기보다는 순간순간 육체와 뇌파가 지배하는 감각의 세계에 현혹되는 것을 즐기는 부류의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자~ 이야기 세팅은 이제 끝났다.
아버지 레몽과 젊은 매력을 지닌 엘자는 육체적인 사랑과 그에 대한 경제적 보상으로 나름 행복한 커플이 고 젊은 혈기의 세실과 시릴은 그저 그 젊음에만 충실하면 행복한 오늘을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마흔 무렵의 안은 그들과는 결이 다르다.
성공한 디자이너로 교향과 고매한 도덕관념 그리고 책임감으로 무장한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홀아비 생활 10년에 사업도 성공하여 젊은 여인들과 자유연애를 지향했던 레몽에게 안은 또 다른 매력이었다. 휴가지에서 바로 애인 세실을 뒤로하고 안과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이에 딸 세실은 도덕심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안이 엄마가 되면 자산의 삶에 개입하여 자유를 잃게 될 두려움에 계략을 꾸미게 되고 그 계략은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세세히 파악할 능력이 있는 세실에 의하여 성공하게 되어 이에 충격을 받은 안은 칸-니스-모나코로 이어지는 깎아지는 절벽 해안가 어느 도로에서 50미터 아래로 떨어지는 교통사고로 죽게 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여기서 오늘의 소설의 제목 '슬픔이여 안녕'에 대한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소설은 세실이라는 어린 소녀의 성장소설이다.
그녀가 철부지 소녀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어야 할 성인이 되었다는 일종의 증명서 같은 것이 슬픔에 대하여 안녕할 수 있는 자세가 준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여기서 안녕은 이별의 안녕이 아니고 만나면 반갑다고 하는 뽀뽀의 의미가 되겠다.
슬픔에 대하여 안녕하고 넘어갈 수 있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앞서 언급한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슬픔에게 안녕이라고 맞이 인사를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주인공 세실의 성장 드라마는 종결을 짓게 된다. 특히, 안의 죽음을 가지고 신(神)이 그녀를 조금 일찍 데리고 갔음에 위안이 된다며 정작 자신들은 신을 믿지 않지만이라는 마지막 대사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만이 진정한 인간다움을 가지고 온다는 모더니즘의 체계에 아예 중세시대로 복귀하여 저 먼 형이상학적 생각에서도 삶을 충분히 살만한 긍정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은 열여덟 살 소녀의 생각치고는 너무 나도 당시 철학적 담론에 대한 반동적 생각을 엿볼 수 있음에 당혹감마저 느끼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신(神)이 지배했던 중세시대나 이것을 깨고 이성으로 충분히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모더니즘, 이성으로 만든 그 숱한 폭력을 경험하고 살아남은 인간들에게 이제 감성도 생각해서 좀 더 인간다운 휴머니즘을 만들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범벅이 된 비빔밥 같은 소설로 타인에 대한 배려 속에 무엇이든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면 된다는 어린 소녀의 당돌한 가르침이 있는 소설이라고 개인적으로 여겨진다.
특히, 어른이 된다는 의미를 단순히 나이가 차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 즉 자신만의 선(善)을 위한 이기적 행동이 아니라 타인의 처지나 상황을 고려한 행동이 우선되어야 하며 혹여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지나친 죄책감으로 자신의 삶까지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위안이 될 수 있는 생각이면 가져다 다시금 삶을 긍정할 내공을 가지고 슬픔에게 만나면 반갑다고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이가 진정한 어른이 아닐까 하는 나조차 어린 프랑수아즈 사강의 생각에 강한 동의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소설이었다는 평을 남기며 포스팅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