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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Sep 19. 2022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인 백석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아마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타자를 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수히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 사람이 백석 시인이 아닌가 싶다.


일제강점기 185cm라는 당시 어마어마한 키에 휜칠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 시작(詩作) 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에 능통한 언어 천재로서 세 번의 결혼을 한 이력과 란이라는 여자와 함께 통영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소로 만들어버린 이야기 그리고 김영한이라는 재일동포 여인이 1980년대 후반 당시 1,000억 원에 달하는 돈을 백석 시인을 위해 길상사라는 절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며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 일, 100권을 사비로 1936년 한정 발간한 그의 첫 시집 '사슴'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용(龍)이 되어 어딘가에서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1억 원을 호가하는 돈으로 사겠다는 이가 지금도 줄을 선 전설 중에 전설의 스토리를 가진 이가 백석 시인이다.


오늘은 이런 백석 시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감상해 보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1938년 초 어느 겨울날 백석 지음


시를 읽고 있으면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따뜻한 방에서 홀로 꿈을 꾸는 있는 듯 몽환적이다.

한 간에 의하면 이 시는 백석 시인이 앞서 언급한 김영한에게 건네주었던 시라고 한다.

김영한이라는 이름보다 김자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기생으로 엄청난 재물을 모아 백석 시인을 위해 법정 스님에게 길상사라는 절을 지어달라고 시주하였으며 말년에 그녀는 그곳에 머무르다 같은 곳에서 숨을 거두어 영면하였다고 한다.

이 시와 동명의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창작 뮤지컬에서 이들의 사랑을 아픈 시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묘사했다고 하는데 1988년 월북작가 해금 이후 백석 시인의 논문만 600편 이상으로 그의 문학세계와 삶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이 김자야뿐만 아니라 통영의 란이라고 불리는 박경련씨와의 사랑도 생각만큼 절절한 사연은 아니었다는 연구 자료가 많이 존재하는 등 그의 드라마틱 한 삶과 서정적인 시문학 세계에 대하여 너무 많은 픽션이 가미되었다는 것이 문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 시는 시인이 서울 생활을 접고 1936년 북으로 낙향하여 함흥의 영생여고에서 영어교사 교편을 잡았을 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에서 화자가 사랑하는 여인으로 부르고 있는 나타샤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통영의 박경련씨는 그의 시에서 란(蘭)으로 지칭되고 있어 당시 함흥의 기생이었던 김영한(자야)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부분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를 그녀에게 건넸다고 하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는가? 또 다른 이들은 그가 러시아문학 번역에 많은 공로가 있었던 만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등장인물인 나타샤 로스토바를 모델로 삼았다는 설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당시 북한 함흥과 만주지역에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계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점을 들어 이국적인 러시아 여인 나타샤를 자신의 이상으로 지칭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러시아는 러시아혁명부터 2차대전이 끝나고 스탈린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기 이전까지는 많은 혼란이 있었는데 그중 적군파와 백군파가 갈려 싸운 러시아 내전이 1917년부터 1922년까지 벌어졌다. 

이때 패한 반혁명파인 백군파편에 섰던 사람들이 적군파의 숙청을 피해 당시 러시아의 영토가 아닌 만주 일대로 많이 망명을 했다고 하는데(대략 10만~ 20만 명) 이때 1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계 사람들이 함흥 원산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1930년대 중반까지 일본제국의 묵인하에 별 탈 없이 지냈으나 1930년대 중반 들어 일본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조선총독부와 만주국에서 핍박을 가하자 미국과 호주 유럽 등지로 다시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무척이나 많은 러시아계 백인들이 별 탈 없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중 많은 러시아 여자들이 조선의 요정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당시 모던보이였던 백석 시인이 그녀들을 꾀나 목격했을 것이며 그 이국적인 아름다움에 나타샤라는 우리네 순이, 영희와도 같은 이름의 러시아 여성을 사랑의 대상으로 노래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자신의 삶과 재능이 늘 특별하다고 여겼던 백석 시인이기에 사랑하는 대상도 순이, 영희가 아닌 나타샤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 같은 나만의 생각을 해본다.


어찌 되었건 간에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 러시아 내전으로 우리의 독립군들도 그들의 군대에 희생되거나 편입되어 우리 역사와 별 상관없는 이념을 위해 전쟁을 치러야만 했으며 많은 러시아계 난민과 어울려야 했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의 우리 역사였다.(사실 6.25도 북한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전쟁이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도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저지할 시간이 모자라 급한 마음에 일으킨 무모한 전술이었음을 감안하면 러시아의 근. 현대 한반도 역사에 대한 영향은 무시 못 할 수준이지만 그러한 역사의 대부분은 북한의 역사로 흡수되어 우리에게 아주 큰 적성국 중 하나였지만 현재는 그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는 가깝지만 먼 인접국 수준으로 인식되고 있는 게 현재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간 것 같은데 이런 배경하에 쓰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살펴보자.


이 시에서 나타샤뿐만 아니라 흰 당나귀도 무척이나 중요한 키포인트인데 알다시피 백석 시인은 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프랑시스 잠과 릴케 그리고 도연명을 사랑했다.

그리고 당나귀는 프랑시스 잠이 늘 타고 다니며 자연을 즐겼다고 하기도 하고 실제 그의 시에도 서정적인 대상으로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도연명 역시 속세의 하잖은 부귀보다 자연에서 즐기는 청빈낙도의 삶을 노래한 전설이다.


이렇게 보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혼란스러운 시대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오로지 시인으로서의 삶만을 고귀하게 살고픈 젊은 시인의 단호한 마음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삶 역시 자신이 노래한 시(詩)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남쪽에서 문학창작 생활을 했다고 한다면 서정 시인으로 서정주 시인 이상의 작품을 남겨 문인계의 거장으로 대학 총장 이상의 자리에서 영화를 누렸을 것이며 선택한 북에서도 김일성 주체사상을 고양하는 글을 썼다면 이 역시 그에게 삶의 영화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프랑시스 잠, 릴케, 도연명처럼 세속적 영광보단 문학적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싶은 순수한 열정 만을 위해 살았다. 그렇기에 그가 젊은 나이에 삼수갑산으로 악명 높은 삼수군의 협동농장의 양치기로 유배를 당하고도 여든이 넘게 살았던 것도 비록 발표는 할 수 없지만 평생을 놓고 다짐했던 순수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며 살았을 것이라는 마음 아픈 짐작을 해본다.


이상 살펴본 것을 종합해 보면 나타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삶을 나타내고 흰 당나귀는 그런 삶이 속세에 영화에 찌든 것이 아닌 순수한 열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지향점으로 이후 이 위대한 시인의 행적을 보아도 그 맹세가 죽는 순간까지도 변하지 않았던 지고지순한 사랑의 자세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현재 한 천재 시인의 삶을 안타까워하고 있지만 나타샤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흰 당나귀를 타고 가는 고운 길이었음 나름대로 짐작해 본다.

북한에서 촬영된 둘째 아들과 막내딸 그리고 아내와 함께 한 백석 시인(오른쪽 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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