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가적일상추구 Dec 01. 2022

농무- 신경림

시 한편 감상하며 1945년 이후의 우리농촌의 역사를 되돌아 본다

신경림 시인은 1936년 4월 6일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다.

1955년 '현대예술'에 '갈대'와 '묘비'등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그 후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글을 쓰지 않고 있다가 1965년 절친한 문인인 김관식의 권유로 상경하여 다시금 작품생활에 전념하였다. 상경 초기 경제사정이 어려워 영어학원에서 강사를 하며 집필활동을 하였고 1973년 첫 시집 농무를 간행하고 이듬해 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현대 한국 서정시사에 큰 족적을 남기었다.


특히, 김관식, 천상병 시인과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였고 워낙에 술을 좋아하였던 지라 많은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관식 시인이 1970년 그리고 천상병 시인이 1993년에 생을 마감하여 현재는 그러한 이야기들은 먼 과거 속의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오늘은 이런 신경림 시인의 대표작 '농무'를 감상해 보자.

신경림 시인

농무(農舞)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아 밝아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둘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신경림 시집 '농무' 中 1973년 창비사



시를 읽자니 지금도 그렇지만 현재로부터 50여 년 전의 글임에도 농민의 노(怒)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 작금의 현실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농촌 희생은 왜 일어났으며 이는 정말 산업화 사회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당시의 농민이 분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사실이며 이때부터 농촌이 강제로 희생을 강요당하던 시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나라는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 당시 전체 농지의 13%가 일본인 소유로 소작되고 있었으며 전제 소작농경작 비율은 65%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재미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일본 군정에 있었던 울프 라데진스키(1899~1975)사람이 등장한다.

미국 사람임에도 이름에서 동유럽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는 원래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1921년 미국으로 망명을 하는데 젊은 시절 그는 러시아혁명의 회오리 한가운데서 느낀 점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혁명 과정에서 지주에게 몰수한 농지를 소작농민에게 무상분배를 하면서 민중이 혁명 지지세력이 되고 그 세력이 군대에 입대하여 혁명가를 자처하는 모습을 보고 역발상 하여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자 소작농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토지개혁을 주장한 자인데 공교롭게도 일본 미군 정부에 근무하며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와 대만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동북아 3국이 전 세계에서 유래 없이 자경농이 증가하게 되었으며 1950년대 국가 경제력이 하위 50%에 속했던 국가 중 2000년대 이후 상위 50%에 자리 잡고 있는 국가가 우리나라와 대만이 유이하다고 하니 아마도 최초 신생 농경국가에서 출발함에 자영농들이 생산성 극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점에서 그의 검증되지 않았던 주장은 지금에 와서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도 1950년대 이후 들어선 냉전시대에서 스파이로 몰려 곧 실각하게 되니 우리나라와 대만은 정말 천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토지개혁은 시작되었는데 한 농가가 소유할 수 있는 농지 최대한도를 3ha로 제한하고 기존에 연간 70%에 달했던 소작료 대신 15년간 20%의 소작료를 내면 그 농지를 소유할 수 있었다고 하니 당시 기준으로는 거의 무상분배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었다.(만석꾼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이유도 바로 이 토지개혁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대지주 계층이 없어지고 오로지 장사에 매달리는 재벌 창업주들의 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이때 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천운을 만난 우리 농민과 농촌이 1970년대 들어 우격다짐식의 희생 강요를 당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1961년 5.16으로 들어선 군사정권과 1964년부터 이루어진 베트남 파병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때 농지를 분배 받은 자영농은 이제 생산성 증대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특히, 베이붐 시대를 지나며 부양가족이 늘었기에 농촌의 현실은 악화일로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이른바 블러드머니라고 하는 파병 대가로 받은 달러로 넘쳐나게 되는 현실에 놓이게 된 것이다.

마치 일본이 전후 심각했던 경제사정을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금 재건했듯이 우리도 그 전쟁으로 인해 직. 간접적인 이유로 나라에 돈이 흘러오던 시기였다.


이에 군사정권은 그 돈으로 근대화라는 명분과 잘 살아보자는 슬로건으로 산업화를 추구하게 된다.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는 아무래도 값싼 노동력 하나만이 경쟁력 우위에 서는 것이 현실이다.

값싼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먹고살고 입는 것에 대한 물가 안정이다. 그래서 공장지대 주변에 주거비가 싼 쪽방촌이 생겨나게 되었고(정부의 무관심) 같은 이유로 쌀값은 정부 수매로 관리(정부의 과도한 관리) 한 것이다. 가격을 높여줄리 만무하였다. 사람들은 암울한 농촌의 현실에서 소 팔고 땅 팔아 자식 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죽어라 농사지어봐야 비료값도 안되는데 자식 공부시켜 고시 합격이라고 할지라면 단숨에 온 식구가 신분 상승을 하던 시절이니 오죽했으랴.

그렇게 70년대를 국가 산업화라는 명분으로 희생당한 농촌은 1980년대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라는 거대 자본주의 논리에 이제는 완전히 백기를 들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자유무역 논리에 시장 개방이 되면서 우루과이라운드. WTO 협상에 자유무역협상까지 전 세계 거대 농업회사에 전. 답 합쳐 3,000평 이상 지으면 부농이라 불리며 부러움을 사는 우리 농촌이 무슨 재간으로 당해낸다는 말인가?


이게 1945년 이후에서 지금에까지 우리 농촌의 현실이요 역사인 것이다.

그중에 첫 번째 분노가 1970년대 자영농들이 생산성 한계에 부딪친 농촌이었던 것이다.

그 최초의 분노의 표출이 신경림 시인의 '농무'이다.

신나게 농악을 울리고 소주를 한 잔 걸쳐도 도무지 흥이 나지 않는 농민들.

소를 팔러 들린 쇠전(우시장)과 도수장(도살장)에서 비로소 썩은 웃음이 나오는 현실 앞에 좌절했던 우리네 옛이야기 이자 아직도 진행 중인 비극.

대한민국 역사에서 농촌의 현실을 되돌아보며 다시금 쓴웃음을 짓게 되는 신경림 시인의 '농무'를 감상해 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래를 위하여- 정호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