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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Dec 13. 2022

채식주의자- 한강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신가요?

어디서 봤는지 그 정확한 철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지만 워낙 강렬한 텍스트라 결코 잊히지가 않는 것이 있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어보라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육식을 끊고 채식을 고집하다 이내 모든 곡기를 끊고 나무가 되겠다고 물구나무를 서서 광합성을 하는 여자. 그런 처제의 몽고반점에서 예술적 동기부여 인지 욕망의 발로인지 모를 호기심으로 이내 처제와 상간을 하는 형부. 정상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중증 정신병자들의 이야기가 모가 그리 대단하다는 것인가! 도모지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이다.



언론인지 블로그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에는 꾀나 공감했었다.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했다고 하기에 읽어본 소설 '채식주의자' 당시 나도 이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인가 싶었지만 다시금 꺼내든 '채식주의자'는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문제적 플롯을 가지고 있는 소설 '채식주의자'로 다시금 들어가 보자.

이 소설은 세 개의 중편소설이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된 연작소설이다.

책의 순서에 의하여 세 개의 소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채식주의자-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 된 영혜의 이야기


몽고반점- 처제(영혜)의 몽고반점 이야기를 듣고 예술적 영감인지 욕망인지 모를 광기에 휩싸여 처제와 상간을 하게 되고 이내 아내에게 발각돼 평범했던 삶에서 유기당한 남자의 이야기


나무 불꽃- 영혜의 언니로 여러모로 건강이 안 좋은 친동생과 성관계를 가지게 되는 남편을 알게 되었다. 맏딸로, 언니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진 가장으로, 아이의 엄마로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책임감으로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여자 인혜의 이야기


이렇게 세 편의 중편소설이 연결되어 있다.

이 소설들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평범한 전업주부 영혜. 그녀는 아이 없이 조그만 회사에 다니는 남편과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꾸게 되는데 그것을 통해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먼저 추악하게 날고기를 주워 먹는 꿈을 꾸고 또 얼마 안 있어는 고기를 썰며 바쁘게 식사를 준비하던 중 도마가 밀리며 손가락을 베고 칼의 이가 나가게 되는데 식사를 하던 남편이 입에서 뱉은 칼의 이를 보고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냐고 따지고 드는 꿈을 꾼 것이다.


그런 꿈들로 인해 더 이상의 육식이 불가함을 느끼고 오로지 곡식과 채소로 이루어진 식사만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남편과 주위 사람 특히, 가족들까지 채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를 위하고 걱정한다는 명분 아래 강제로 고기를 입에 들이댄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모욕과 반발심에 가족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해를 시도하고 병원에 입원한다. 병원에서 햇빛을 더 느끼기 위해 분수대에서 윗옷을 벗는 기행을 저지르자 이내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고 남편과는 이혼당하게 된다.

채식주의자 줄거리


비디오 아티스트인 남자가 있다. 그는 소위 말하는 가난한 예술가이다. 하지만 장사 수완이 뛰어난 아내 덕에 금전적인 걱정 없이 창작 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간 잠들어 있던 예술적 영감이 분출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극과 호기심이 버무려진 난장을 통해서였다.


그 일은 아내의 화장품 장사가 그 규모를 점점 키워가더니 이내 대학가에 꽤나 큰 화장품 코너가 되을 만큼 성업을 이루게 된다. 그로 인해 그들의 보금자리인 아파트를 평형을 넓혀 이사를 가게 되고 그날은 장인. 장모에 처남과 처제 내외와 함께 집들이를 하던 때였다.

처제가 그 어떤 형태로든 육식을 하지 않아 야윈 모습을 보고 걱정된 월남전 참전용사 출신의 장인이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다 땜을 때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이에 처제는 과도로 손목을 긋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선혈이 낭자하는 상황 속에서 침착하게 처제를 들러 업고 병원 응급실에 옮겨 놓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이야기를 하던 중 동생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듣고 두 가지 이미지가 섞이며 묘한 예술적 영감과 호기심이 범벅이 된 욕망이 발현하게 된다.


남자는 피와 몽고반점에서 꽃과 같은 생명력을 느끼고 보디 페인팅을 통해 처제의 누드 비디오를 찍고 이내 자신도 보디 페인팅을 하고 성관계를 갖는 비디오를 찍게 된다. 물론 단순한 욕망이 아닌 예술적 영감의 현상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동생을 걱정하여 반찬을 가지고 온 아내에게 비디오가 발각되고 그렇게 발현된 영감과 욕망의 뒤섞임으로 모든 일상을 잃고 유기되게 된다.

몽고반점 줄거리


여자(인혜)는 교육자와 의사가 있는 집안에서 자라 미대를 나와 소위 말하는 예술가인 남자를 배우자로 맞이한다. 애초부터 경제적 능력이 없었던 남편인지라 본인이 두 평 남짓으로 시작한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게 되는데 그것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나름 직원과 마사지사까지 해서 몇 명을 고용한 제법 큰 규모로 성장하였다.


그렇게 일이면 일, 가정이며 가정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것들을 펼쳐 놓고 살던 그녀에게 '몽고반점'에서 일어난 두 가지 일로 일상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얼굴로 그녀와 대면하게 된다.


인간 사회에서 금지 시 되는 것을 행한 남편과의 이별, 정상의 범위에서 일상을 누리고자 했던 남편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이혼 당한 여동생 영혜의 보호자가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아들 지우에 대해 홀로 책임지게 될 양육의 의무 등이었다.


삶에 무게 지어진 것들에 대해 생각. 특히, 이제는 도무지 미쳤어버렸다는 표현밖에 서술되지 않는 영혜의 피폐한 모습에 그간 정상적 생활인이라는 그 타이틀을 위해 감내해야 했던 아픔들을 다시금 되뇌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나무 불꽃 줄거리

소설가 한강

꼬리에 꼬리를 무는 듯한 답답한 이야기의 끝은 무엇일까?

결국 여기 나온 세 인물 아니 영혜의 남편까지 네 인물의 삶 중 우리에게 긍정적 메타포를 주는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영혜: 무의식의 기저에 있던 것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들이며 더 이상 폭력적 억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육식(肉食)을 뒤로 한 채 식물과도 같은 순수한 삶으로의 회귀를 꿈꾸었던 자.


영혜의 남편: 평범한 일상적인 삶을 위해 평범하지 않았던 아내와의 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후 비정상적인 아내에 대한 책임을 덜며 그 자신이 원했던 자식을 낳아 기르는 그 평범한 삶을 추구했을 자.


인혜의 남편: 예술적 영감과 알 수 없는 욕망을 발현시킨 후 모든 일상과 과거로부터 유기된 사람으로 이루기 금지되었던 것들을 이루고는 모든 것을 잃은 자.


인혜: 그 모든 비극을 정상인의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했던 사람으로 그 후에도 본질 지어진 사람으로 의무감에 과거와 미래의 비극의 칼날을 어떻게든 아린 가슴으로 소화하며 살아가야 할 자.


이 네 인물 중 진정으로 자유의 삶을 누린 자는 누구라고 생각되는가?

아마도 네 인물 다 아니 올 시다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는 이 네 가지 케이스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그저 평범한 일상이라는 무의적 삶에 안주하며 산다.(영혜의 남편)

● 그 안주로 희생된 자신의 내면을 의식하지만 그래도 본질 된 그 무엇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상처받은 무의식이라는 칼날을 끌어안으며 산다.(인혜)

●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영감과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채 엄청난 열정으로 몸소 실현해 보지만 그에 대한 뒷감당으로 사회적 도태라는 벌을 받고 살아간다.(인혜의 남편)

● 무의식을 억압하는 초자아를 분쇄하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끝내 이룬다. 그것이 죽임일지언정.(영혜)


그렇다 우리 대부분은 영혜의 남편이나 인혜를 삶을 살고 있다.

본질 지어진 그 무엇으로 그것 들을 해나가며 타인 속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는 그런 피상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혜의 남편의 삶은 도덕적 기준에서 영혜의 삶은 사회 보편적 관점에서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으나 그들은 자신의 실존을 위해 한 번쯤 아니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온 삶을 바쳐 반항했던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점이 아닌 극단에서(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길 수 있는 영혜의 남편과 인혜도 실존적 불안의 테두리 안에서 본질적 삶을 택한 극한의 상황에 선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와 자유는 과연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소설이 바로 '채식주의자'였던 것이다.


이제 과거의 나의 의문은 해결되었다.

왜 정신병리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가는 소설이 이리도 우리에게 많이 읽히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의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했을 때 모두 네 가지 중 하나(거의 대부분은 두 개의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에 분명 자신의 삶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쯤은 자신의 실존에 대하여 그리고 그 실존적 삶을 위하여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며 또 무엇이 희생 되어지는가에 대하여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조금 더 자유롭고 가볍게 살 수 있는 경계에 다가갈 수(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있는 사람이 되어보고자 하는 마음에 대하여 열린 생각으로 접근할 기회를 준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인 것이다.


나의 삶에서 억압되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 초자아를 인식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 그 밖으로 나아가되 그에 따른 책임에 대하여 성찰할 계기를 마련해 준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였다.

평범한 일상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감내하며 괴로워했던가!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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