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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가적일상추구 Aug 30. 2023

이광수- 무명(無明) 줄거리 및 해석

춘원 이광수 하면 그의 친일행적과 그에 대한 자기변명으로 이미지가 상당이 부정적인 문인(文人)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로 인정받고 있는 무정과 다수의 역사소설을 썼지만 너무나도 적극적인 친일행위로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일제가 내세우는 대동아공영 제국을 건립하자며 황국의 군대에 입대하여 영광스러운 전쟁에 참전할 것을 권하는 내용과 일제를 찬양하는 내용의 언론 발표 작품(?)만 108편이 이를 정도이다.

오죽하면 해방 후인 1948년 작성된 '친일파 군상'에 '광병적(狂病的) 친일급 열렬 행위자'로 규정되어 있다.

오늘은 이런 춘원 이광수의 삶과 그가 친일로 본격적으로 돌아서는 계기인 1937년부터 1938년까지의 수양동우회 사건을 겪으면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던 경험으로 쓰인 '무명'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춘원 이광수

이광수는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살 때 역병으로 인해 부모를 여의고 1902년 동학(東學)에 들어가 서기 노릇을 했으나 관(官)의 탄압에 못 이겨 2년 만에 도망쳐 한성으로 올라온다.

이때 이미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가입하고 거기서 추천하는 장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유학 중학교과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향 정주로 돌아와 오산학원에서 교사가 된다. 한마디로 천애고아가 명석한 두뇌로 당시로는 고등교육이라고 할만한 고등학교 과정을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1917년 일본의 와세다대학의 철학부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미 그땐 그의 대표 소설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로 꼽히는 '무정'을 발표하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과를 내어 당시 한성에서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자는 그의 책을 안 읽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삼일운동이 있던 1919년에는 조선청년독립단 선언서(2.8독립 선언서)를 쓰고 영어로 번역한 뒤 상해로 망명을 한다.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되기도 한다.

이 시대 이광수는 지금도 회자되는 애정행각을 벌이게 된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백계숙과는 합의이혼을 했고 일본 유학시절 만났던 한국 최초의 여성산부인과 의사 허영숙과 역시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 사이에서 양다리 연애도 하게 되는데, 이때 이 사실을 알게 된 허영숙의 종용으로 둘 중 허영숙을 선택하여 결혼하여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38년 4월 일제는 식민지 총동원령을 내리고 이듬해엔 태평양전쟁까지 저질러 버리게 된다. 그간의 식민지정책과는 다르게 가혹한 수탈과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시행되고, 당시 사회적으로 특히 기득권이나 지식인들은 대놓고 친일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한국어 출판도 금지되고 많은 민족 계열 문인들은 절필까지 하는 상황에서 이광수는 누구보다 먼저 창씨개명을 하고 천황폐하의 위대한 군대에 우리 조선 젊은이들이 입대하여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앞장설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많은 문인들이 이광수와 같은 친일에 앞장섰는데 일부 문인들은 당시 그러한 행적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했던 반면 이광수는 해방 후 논리적 근거가 없는 이유로 자신을 합리화하여 그간의 문학적 성과까지 까먹어 과연 그의 소설이 당대에서는 인정받았다 하지만 현대의 문학사적 가치로 봤을 때 고전문학이라는 불멸의 영광은 고사하고 후대 끼친 영향 또한 미비하다는 폄하의 비난까지 받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1990년대 남북화해 물결을 타고 밝혀진 바에 의하여 6.25 때 납북되었으나 이미 건강이 나빠질 때로 나빠져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유엔군의 반격으로 평양을 내주고 북한의 임시수도였던 강계의 한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했다는 것이 지금 밝혀진 그의 죽음이다.

소설 '무명'의 무대인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이렇게 어떻게 보면 부정적 의미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이광수도 1938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깨달음을 얻은 듯 불교적 세계관으로 서대문형무소의 미결수 중생(衆生)들의 삶을 관조하듯 담담한 어조로 써 내려간 소설 '무명(無明)'을 1939년 2월 '문장'지 창간호에 발표한 하는데 오늘 살펴볼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무명(無明)은 불교의 교리와도 같은 세상의 이치인 삼법인(三法印) 설을 모르는 중생들이 고통을 받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우선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말하는데 결국 해탈하지 못한 인간의 삶은 고통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우주 만물 중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그것이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따라서 나 또한 나라고 지칭할 수 있는 구체적 실존이 아님에도 나(我)의 주관으로 나에 집착한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우주 만물의 섭리를 거슬러 나의 주관에서 비롯된 오욕(五慾)에 집착하니 삶이 곧 고통이다.

'곧 고통이다' 이 부분을 표현한 것이 빛이 없어 고통받는 무명이며 사람의 마음엔 누구나 불심이 있으니 무쏘의 뿔처럼 흔들리지 말고 외롭게 정진해서 삼법인을 깨달아 열반에 경지에 이르러 무지한 중생의 윤회의 고통에서 빠져나오라는 말이 된다.


형무소 6개월의 경험으로 무지한 미결수의 삶을 통해 부처님의 '무명'의 철학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다소 건방진(?) 소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의 부정적 이미지와 함께 떠오르긴 한다.(편견이나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가 이육사 선생처럼 의지 단단한 조선 사람이었다면 그런 경험에서도 부처님의 생각으로 견디어 냈다는 점에 나는 분명히 탄복했을 것이다.)


소설은 1930년대 후반 당시 미결수들이 수감된 서대문형무소 감방 그중에서 환자들이 수감된 병동에서 나라는 지식인이 방화범, 사기범, 협박범 등의 잡범(?)들이 병약한 상황에서도 서로의 작은 이익과 편의를 위해 아웅다웅 하나 거의 대부분이 그들의 병을 못 이겨 죽고 마는 현실을 지식인 화자가 관조적으로 서술한 단편소설이다.

사실 줄거리 포함 해석이라고 제목에 적었지만 줄거리랄 것도 없이 그저 사회적으로 힘없고 죄를 지은 자들이 병들에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각자의 이익과 편의 그리고 알량한 자존심과 이기심에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상황을 아수라 지옥에 비유하고 그중 정씨성을 가진이가 부처님 불경을 뜻도 모르고 외우며 현생과 내생의 안녕을 구하는 모습을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지한 사람들의 세상이 더욱 진흙창이 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느낀 것은 그런 와중에 각자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모습도 어찔할 도리가 없지만 그 와중에 이타적으로 살며 현실 세계의 무의미성을 깨달아 마음의 평온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는 수행이나 열반의 세계가 열리는 일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에 너무 허무주의적 관점으로 춘원 이광수가 세상을 바라보니 일제에 더욱 협력하는 '광병적(狂病的) 친일급 열렬 행위자'가 되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 또한 들었다.

그리 길지도 어렵지도 않은 소설을 통해 어쨌든 한국 최초의 근대적 소설을 쓰고 문학적 업적 또한 무시할 수 없었던 천재 작가 이광수의 의식의 흐름을 쫓아 읽는 재미가 쏠쏠한 소설 '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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