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세계 1차 대전 때와는 다르게 2차 전쟁 중에는 아예 독일에 점령당하면서 프랑스인들은 오늘날의 비극이 과연 무엇 때문이었는가에 대한 원론적인 물음과 함께 앞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적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여담이지만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단서는 나치에 부역했다고 여겨지는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고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의식체계는 기본적으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입각한 세계관으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세상일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어찌 되었든 간에 1945년의 유럽의 철학가들은 기존의 계몽주의적 이상주의 세계관이 이러한 비극을 초래했다데 의견을 함께했다.
위 명제만을 인정했고 철학자들은 경제적 국가 체계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서는 각기 다른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고자 했으니 자본주의는 실증주의. 실용주의. 실존주의가 큰 물줄기였으며, 공산주의에서는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파악되는 사회과학을 가지고 인간의 존재가 우선시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사실 오늘날에 와서 보면 당시의 철학적 시도는 생각했던 대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할 것이다.
정말로 인간의 존재가치가 최우선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할 사람이 그 누가 있을까?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독트린에 물질만능주의로 퇴락했으며, 공산주의는 스탈린 이후 관료화되어 많은 독재자를 낳았고 북한의 김정은은 논외로 하더라도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 모두 장기집권하고 더 나아가 종신집권의 법률적 틀까지 바꾸어가며 군림하는 모습에서 앞서 말했던 인간의 존재가치가 최우선이 되는 세상과는 먼 국가 체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 17세기 계몽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존엄성 회복운동은 그로부터 4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물질적 풍요와 생명 연장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인간 소외 현상은 여전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렇게 지난하게 전개되었던 근. 현대 철학사에서 1945년 전쟁이 끝난 10월에 있었던 장 폴 사르트르의 강연을 책으로 엮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서두에 소개한 대로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상주의가 되려 인류의 대량학살(전쟁으로 인한 군인과 민간인들의 희생과 파시즘으로 인한 홀로코스트 문제 등)이라는 경악할 만한 결과를 가져오자 새로운 철학에 대한 요구와 성찰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영향을 받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그의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에 대한 해명의 강연을 하게 되고 이를 책으로 엮은 것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가 되는 것이다.
그럼 천천히 1945년 10월 29일 월요일 파리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1.2차 세계대전 각각 서부전선을 모티프로 제작된 영화 1917(左)와 덩케르크(右)의 포스터
우선 책의 구성은 이렇다.
강연의 상황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토론
이 책을 읽는 데 도움이 될 옮긴이의 실존주의 용어 해설
옮기고 나서
우선 이 책은 '실존주의'가 당시 담론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시기 실존주의에 대한 어느 정도 이해가 있는 청중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강연의 내용을 정리한 일종의 강연록이다.
특히,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이 공산주의 유물론자와 기독교계에서 유난이 컸던 시기에 강연이 진행되었던 상황에 대한 장 폴 사르트르의 딸 아를레트 엘카임-사르트르의 글 '강연의 상황'이 강연에는 없었던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는 독자가 겪게 될 혼란을 막기 위한 아주 훌륭한 프롤로그가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나서 사르트르의 강연록에 해당하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내용 소개되고, 강연 후에 있었던 토론의 내용이 뒤이어진다.
아무래도 실존주의라는 철학에 대하여 심도 있게 다루어지는 강연과 토론이기에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사전 지식 특히, 하이데거처럼 사르트르가 특정한 상황에 대한 용어를 만들었기에(물론 하이데거의 철학 용어도 많이 등장한다) 이에 대한 용어 해설이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옮긴이 박정태 박사의 에필로그로 마무리된다.
우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말하는 세계관에 대하여 알아보자.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영향하에 좀 더 현실에 다가가는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같이 내던져진 존재로 인정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어떤 필연적 이유 없이 그저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 속에 우연의 일치로 내던져진 존재라 정의한다. 그 지점에서 바로 '존재와 무'의 핵심 개념인 무(無)의 관념이 탄생하게 된다.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무가 아니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의 무(無) 한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 유명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 파시즘하에 비행기 파일럿이 대일본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태어난 사명을 다하기 위해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어 미국의 전함에 돌진하는 모습에서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파일럿은 애초에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해 태어난 존재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 인간의 삶은 이미 정해져있는 것이다.(멀리 볼 것도 없이 예전에 우리나라의 '국기에 대한 맹세'를 보아도 우리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본질을 타고났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그저 우연의 산물인 인간에게 본질을 뒤집어 씌운 것 자체가 인간의 인위적인 객체화이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며 인간의 존재는 무에서 시작하기에 태어난 인간에게 본질은 있을 수 없으며 실존이 선(先)이며 본질은 차후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장 폴 사르트르
아울러 책을 이해하기 위한 사르트르의 중요한 개념 두 가지를 더 소개하고 한다.
먼저 자유-책임-불안 그리고 앙가주망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이렇게 아무런 본질 없이 태어났기에 자유롭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본질이 있는 인간은 그 본질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아이는 부모의 뒤를 따라 열심히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가톨릭 성서에서 규정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파시즘 국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 전체주의의 번영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세뇌되어 국가에서 선(善)으로 규정된 삶에 충실할 것이다.(물론 이에 반하여 종교를 버리거나 국가에 투쟁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 함몰적인 삶을 살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주장했던 악의 평범을 떠올려보자)
하지만 사르트르는 우주 만물들의 우연의 산물인 우리는 본질 된 존재가 아니기에 실존 그 자체로 자유롭다고 했다. 이 자유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선택을 강요하게 되고 자유로운 주체인 우리 인간은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에 대하여 책임질 의무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우리 모두가 삶을 살면서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선택과 책임에 대하여 그런데 이 선택과 책임에 대하여 늘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정말 정의롭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도 성공은 아니더라 여러 가지 이유로 절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이에 대한 철학 용어는 부조리쯤으로 해도 좋을 듯하다). 물론 나쁜 놈이 더 잘 산다는 것에 대해선 굳이 말하지 않겠다.
이 선택과 책임 그리고 절망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불안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 실존의 위기를 잊기 위하여 우리는 일상에 함몰되는 자기기만의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며 사르트르는 그 해결책으로 정의로운 앙가주망을 제시한다.
태어나서 자유롭게 선택을 하는 인간은 미래의 가능성에 직면하여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를 기투라고 한다.
한마디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기투는 내가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며 나는 자연인이다를 외치며 그렇게 살고자 한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지만 타인과 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세계-내-존재)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이런 기투는 나 자신에게뿐만 이 아니라 가족-사회-국가 더 나아가 인류 전체에 앙가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겠다는 기투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나의 가족과 출산을 장려하는 국가 및 인류 전체에 대해서도(결혼제도와 자녀 출산에 대한 긍정-반대로 결혼은 안 한다, 결혼은 해도 아이는 낳지 않는 딩크족이 된다 등등등 나의 선택과 행동이 제도. 철학. 정책. 이념 등 인류 전체와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모종의 의사표시 및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반드시 자기기만의 상태에서 벗어나 실존적 불안 속에서 각성하여 인류 전체의 올바른 방향에 대하여 앙가주망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지는 성숙한 시민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간략하게 정리해 본 사르트르 실존주의라 할 수 있겠다.(너무 짧은 설명이고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기에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틀안에서 이해하기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 폴 사르트르
책의 목차와 사전 지식을 소개했다. 물론 아주 짧고 얕은 것이지만 그래도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토대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책에 접근해 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사실 책이 소설이 아니기에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빼면 딱히 추가할 내용이 없다.
위 내용대로 사르트르가 실존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자들과 기독교계에 비판에 대하여 반박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책 첫머리(강연 초반)에는 당시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추리는데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정적주의, 부르주아 철학이 아니냐는 비판, 기독교계에서는 '존재와 무'라는 것 특히 사르트르가 주장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결국에는 삶이 무상하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이 그것이며, 이에 대한 반박 내용을 강연한 것이다.
이 강연은 이에 대한 사르트르의 반박과 토론으로 이어진다.
짧은 분량의 책이기에 차분히 읽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다.
본인도 이 책을 10년 전에 읽다 말고 근래에 와서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칸트와 헤겔 그리고 청년헤겔파와 하이데거로 이어이는 독일 이상주의 철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절대로 쉽게 허락하지 않는 저 높은 고지와도 같은 철학적 논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서 전후 철학중 현대철학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치고 있는 철학이 실존주의가 아닌 아드르노의 비판철학이기에 철학적 가치가 많이 퇴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 실존주의 철학이 부르주아 철학으로 전락한 부분도 부정하기 힘들기에 당시에서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이에 받아 전후 프랑스 철학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혁명적 요소가 부족하여 정당정치에 녹아들지 못하고 몇몇 위대한 실존주의자만을 배출하고 만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다.(아도로느의 47년 발표작 '계몽의 변증법'에 의한 이성 비판으로 68혁명이 일어나고 현재의 시대적 조류가 신자유주의 폭주를 견제하는 좌파운동이라고 할 때 실존주의 철학은 하이데거 이후 존재론의 확립 정도의 역할 정도만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지금 와서는 그 철학적 가치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전후 치열했던 인간소외 문제에 대한 철학적 반성과 공산주의와 기독교계의 논쟁을 보는 재미도 솔솔(이해하기엔 좀 괴롭긴 할 것이다) 하기에 충분히 흥미 있는 책이기에 추천하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