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오닐, 아서 밀러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로 불리고 있는 테네시 윌리엄스.
그는 1911년 남부의 미시시피주에서 본명 토머스 러니어 윌리엄스로 태어났다.
테네시라는 이름은 아이오와 대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에 스스로 개명한 이름으로 그의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당시 남성적인 미국인의 상징 격인 이름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남성적인 이름으로 개명하였지만 동성애자로 커밍아웃을 한 이력을 보면 그 이유는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플리쳐상과 뉴욕 극비평가상을 다수에 걸쳐 수상하였으며 대표작으로는 오늘 살펴볼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유리 동물원' 등이 있다.
1940~ 60년대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으나 점차 변해가는 세상에서 그의 극본이 식상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화려했던 시절에 비하면 하대라 할 수 있는 대접을 받다 1983년 어느 호텔 방에서 병 마개가 목에 걸려 질식사했다. 쓸쓸한 말로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1955년 발표된 작품으로 퓰리쳐상과 뉴욕 극비평가상을 수상한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줄거리를 살펴보면 발표된 1950년대를 감안하면 충분히 문제작이라고 이야기할 만큼의 파격적인 소재이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미시시피강 유역에 가장 비옥하며 규모가 큰 목화 농장을 소유한 빅대디(민음사판에서 할아버지로 번역하고 있음)는 65세 생일을 맞이하여 가족 파티를 열고 있다.
그에게는 부인과 아들 둘이 있는데 큰아들은 변호사이며 5형제를 두고 있고 현재 아내가 여섯째를 임신 중에 있다. 전직 풋볼 선수이며 현재는 은퇴하여 스포츠 중계를 하고 있는 작은아들 브릭은 결혼했지만 아직 아이는 없다.
이렇게 모인 가족은 당대(1950년대) 부유한 집안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 많은 문제를 짊어지고 있는 가족이었다.
우선 빅대디는 암으로 시한부 삶을 판정받았다. 가족들은 그의 생일이라도 유쾌하게 지내고 차후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 대형병원의 검사에서 단순한 장기 경련이라는 판정을 내렸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는 이에 속에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다시금 가족의 문제에 관여하고픈 마음이 절로 생긴 참이었다.
그리고 큰 아들 구퍼와 메이는 많은 자녀를 둔 이유로 자식이 없는 둘째 브릭과 마거리트를 목화 농장 상속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품으며 속물근성을 숨기지 않는다.
한편 브릭은 과거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사귀었던 친구 스키퍼가 그 둘의 그런 관계로 주위의 오해를 받자 거의 자살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으로 죽자 최소 알코올의존증이나 중독에 걸려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브릭의 부인인 마거리트(극에서는 매기로 불린다)는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가난하게 성장한 이로 남편 브릭이 목화 농장을 상속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편에 대한 사랑 또는 관심을 갈구하지만 브릭은 그런 부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술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모습에 좌절 자신의 처지를 여름날 뜨거운 양철지붕 위에 고양이에 비유하며 비관한다.
이런 두 아들과 며느리들의 상황과 처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빅대디는 어렸을 적부터 운동을 잘하고 매력적인 용모를 지닌 둘째 아들 브릭을 편애하여 자신이 죽으면 목화 농장을 브릭에게 물려주고자 하며 근래 술에만 의지하는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드디어 생일날 저녁 아버지와 브릭은 둘만의 대화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브릭의 현재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금 예전의 유망했던 풋볼 선수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이런 연유로 시작된 부자간의 대면은 여러 무의미한 대화 끝에 아들의 방황이 스키퍼와의 일과 그의 죽음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가지고 주변에서 하는 의심과 모진 말에 상처받은 것을 들쳐내게 되고 이에 강하게 부정하던 브릭 역시 화를 참지 못하고 사실은 그의 아버지가 시한부 삶 판정을 받은 말기 암 환자임을 밝힌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큰아들 구퍼는 알코올 중독에 자식도 없는 동생 대신 자신에게 목화 농장을 상속해 줄 것을 대놓고 요구하며 서류를 들이민다.
이제 모든 일들이 가식 없이 가족들 앞에 그 정체를 드러냈다.
현실적으로 동성애 성향을 가진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브릭에게 유리할만것을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브릭의 아내 매기는 자신이 사실은 임신을 했다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아버지는 연신 마음을 놓으며 축하한다. 하지만 그간 브릭 부부의 대화를 엿들었던 구퍼 부부는 둘의 애정 없는 관계를 거리낌 없이 폭로하며 임신이 거짓이라 주장하고 이런 매기를 보고 무대응으로 일종의 긍정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브릭 그리고 그런 남편의 행동에 매기는 감동하여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또다시 냉담한 반응으로 일관하는 브릭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극은 마무리된다.
이 희곡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단 하나이다.
독점 자본주의 시대에서 신자유주의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시대 담론이 어떻게 변화하면서 우리의 의식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았는가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프랑스혁명을 진정한 부르주아 혁명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사실상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은 기존의 귀족과 기독교 고위층이 가지고 있었던 권리를 부르주아 계층에게도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자본가들의 재산권을 보장하면서 그들이 그 자본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입법. 사법. 행정에 대한 권리를 확대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본가들의 투쟁은 맞아떨어져 20세기 들어서면서 몇몇 금융자본가들이 전 세계 부(富)의 대부분을 독점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그 욕망의 비극이 1.2차 세계대전이고 그 전쟁을 통해 자본가들이 세상 전면에 나서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 이후 독점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로 폐기되었다. 대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는데 이 시스템에서 자본가들은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는 모든 이들의 자유를 추구하고 보장한다는 대의명분하에 자본은 자유롭게 전 세계를 누비며 세를 불리고 대중은 더 많은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고 느끼게끔 다양성 공존이라는 문제가 대두하게 된다.
제3세계 발전을 추구하고 소수를 배려하고 위한다는 명분 아래 인류는 더욱 진보되고 자유로운 사회 속에서 어느 누구라도 사람답게 살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지금껏 인류가 걸어온 이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극의 주요 갈등은 목화 농장 상속이라는 물질적 욕망과 동성애라는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자의 고통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 21세기 초반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 이상 동성애적 성향이 배척받을 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본에 더 종속되는 대신 다양성 존중이라는 반대급부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뜨거운 양철지붕 위에 고양이'가 진부하다고 느껴지는 건 변함없는 부(富)에 대한 욕망과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소수에 대한 인정 또는 존중의 문화가 주류로 자리를 잡은 까닭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1950년대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돈에 저렇게까지 집착하며 가족 간에 서로를 미워하고 염탐하며 상처 주어야 하는 생각과 더불어 동성애가 범죄 취급을 받던 시절 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받아야 하는 논리에 황폐해지는 삶의 모습에 적잖이 공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80여 년이 지나가고 있는 즈음으로 우리의 정신이 자주적으로 변모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거대 자본가와 그에 협치하는 철학가들의 논리에 우리는 거대 자본에 대한 더 이상의 투쟁은 접고 오로지 개개인 모두가 존중받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에 만족하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다분히 개인적인 생각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겠지만 자조 섞인 쓴웃음을 지으며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극의 전개 속에서 작가가 의도하는 갈등하는 인물들 개개인의 문제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그간의 우리의 사회와 사상이 어떻게 변했는가에 대한 생각만이 들었을 따름이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에 고양이'포스팅을 마무리하며 나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1955년 사회와 지금의 사회. 무엇이 변했고 나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생각 중 자본주의 사회가 기득권의 욕망을 위해 강요된 것들을 스스로 생각하는 정의로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는가?
변화된 세상 속에서 이미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희곡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글을 마무리한다.